설교말씀 영상

sermon

양정교회 홈페이지와 YouTube 채널을 통하여 설교말씀과 강의를 영상/음성/스트리밍으로 제공해 드리고 있습니다. 2004년 8월 부터, 현재까지의 영상과 말씀 음원파일을 홈페이지를 통해 열람이 가능하며,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설교말씀 다시보기를 통해, 예배시간에 받았던 은사와 감동을 다시한번 회고하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등록된 설교영상 : 1,956
아버지  [2926]
· 설교 일자 : 2010년 05월 16일
· 본문 말씀 : 골로새서 3장 18-21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신문수 목사님의 다른 말씀 보기

아버지 (골로새서 3장 18-21절)

  “아빠!” 서른이 넘은 나이지만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아빠!”라고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아버지를 “아빠”라고 해본 기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엄마”라고 잘만 부르면서도, 아버지는 왜 “아빠”라고 한 번도 부르지 못 했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장남이라서 그랬을까요?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엄하고 제게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높디높은 분이셨습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하고 함께 있으면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무서운 적이 많았다는 걸. 혹시 아버지는 알고 계셨나요? 해가 갈수록 늘어만 가는 흰 머리카락, 목욕이라도 함께 갈 때면 수척해진 아버지의 모습에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 제가 어른이 되어갈수록 아버지의 진정한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어려운 시절, 가족을 위한 든든한 방어막처럼 아버지는 그 어떤 고통에도 끄덕하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힘이 들어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항상 노력하셨지요. 저도 이제 아버지가 걸어가셨던 길을 그대로 걷고 있습니다.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랫말처럼 오늘 밤 저는 갈수록 험한 세상사에 전보다 더욱 지친 어깨를 늘어트린 아버지를 예전처럼 마중 나가려 합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아직도 저의 영웅이십니다. 그리고 늦긴 했지만 이제라도 아버지를 마음껏 “아빠”라고 불러보려고 합니다. “아빠! 힘내세요. 마음 깊이 사랑합니다.” 세상살이에 자꾸 지쳐 가시는 아버지에게 작은 힘을 드리고 싶은 장남 올림. [가정과 아버지]라는 잡지에 실린 글입니다.

  오늘은 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가정 안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말씀합니다. 이 시간에 특별히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내의 남편으로써, 자녀의 아버지로써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존재는 단순히 자녀에게 교육비를 대주는 경제적 후원자가 아니라 자녀의 정신적 도덕적 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커다란 존재입니다. 특히 자녀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각기 다른 덕목을 배우며 자랍니다. 어머니에게서는 감성적인 측면과 사랑을 배우지만, 아버지에게서는 도덕적 의식과 현실을 이기는 힘, 규율을 배웁니다. 따라서 자녀교육은 부부가 함께 해야 합니다. 유아기에 아버지 부재를 경험한 아이들은 수리능력이 떨어지고 성취동기가 낮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남자아이의 경우 아버지와 일체감을 느끼고 따뜻한 관계를 유지할 때 또래에서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영향은 아주 중요합니다. 물론 아버지가 계시지 않다고 해서 모두가 다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에스더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였나 봅니다. 그런데 에스더를 훌륭한 여성으로, 지혜와 아름다움과 좋은 성품을 갖춘 왕후로, 민족을 구원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결단하는 지도자로 자랄 수 있도록 아버지 역할을 해 준 사람이 있습니다. 사촌 오빠 모르드개입니다. 아버지처럼 그가 에스더를 양육했습니다.
이처럼 누군가 그 가정에 아버지 역할을 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정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들로 구성되게 하신 뜻과 원리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는 아버지라고, 아빠라고 불려지는 사람은 있지만, 아버지의 권위는 사라지고, 아버지의 역할은 점점 약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어령 박사의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에는 “아버지 없는 사회”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지금 우리나라 사회에서 급속히 변화해 가고 있는 아버지의 지위와 권위의 하락 그리고 아버지의 역할의 왜소화는 우리나라가 단순히 가부장제도의 붕괴나 남녀평등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관점에서만 풀이할 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버지 없는 사회’ 현상은 지금까지 인류를 떠받쳐왔던 아버지- 어머니- 자녀의 삼각구조가 무너지고 있는 가족 자체의 붕괴를 의미한다고 심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아버지 없는 사회의 비극은 남성의 소외나 주도권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과 아이를 포함한 인류 모두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 사회, 아버지의 권능이 무력해진 사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아버지 없는 가족’ ‘아버지 부재의 사회’가 되어 갑니다.
  한국 남성 아버지가 죽은 것은 월급봉투가 온라인으로 아내에게 직접 송금되었던 바로 그날이라는 농담이 있듯이 교육도, 경제권도 모두가 아내가 장악하면서 남자는 ‘가시고기’가 되었다고 이어령 박사는 한탄합니다. 여러분, 가시고기를 아십니까? 조 창인씨의 [가시고기]라는 소설로 대중들이 가시고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가시고기 본문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내용을 잘 나타내주는 글입니다. “가시고기는 이상한 물고기입니다. 엄마 가시고기는 알들을 낳은 후에 어디론가 달아나 버려요. 알들이야 어찌되는 상관없다는 듯이요. 그럼 아빠 가시고기가 혼자 남아서 알들을 먹으려고 달려드는 다른 물고기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답니다. 먹지도, 잠을 자지도 않으면서 열심히 알들을 보호하는 거예요. 알에서 깨어나 무럭무럭 자라난 새끼들은 어느 날 엄마처럼 제 갈 길로 떠나버리죠. 그리고 홀로 남은 아빠 가시고기는 돌 틈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버린답니다. 가시고기는 언제나 아빠를 생각나게 만듭니다. 아 가시고기 우리 아빠.” 이 소설에, 다움이라는 아이가 등장합니다. 그의 엄마는 어렸을 적에 다른 남자를 만나 프랑스로 떠나버렸습니다. 다움이의 기억 속에는 엄마란 존재의 기억은 없습니다. 다움이는 백혈병 환자입니다. 자신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이제는 자신이 그만 죽었으면 하는 불쌍한 아이입니다. 다움이의 아빠는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다움이의 병원비를 내기위해 밤낮없이 노트북으로 글을 쓰며 빠듯하게 다움이의 병원비를 내고 있습니다. 다움이도, 아빠도 너무 지쳐서 치료를 포기를 하려고, 다움이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산속에서 한 노인을 만나는데 그 노인도 예전에 백혈병에 걸려서 이산에 들어와 이것저것 약초를 캐 먹다보니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아빠는 희망을 걸고 노인과 함께 약초를 캐서 치료합니다. 그러나 다움이 병이 조금씩 나아가다가 다시 재발을 합니다. 그러던 중 병원의사에게 전화가 옵니다.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골수이식뿐이라는 것. 다움이는 또 다시 지옥 같은 병원으로 들어가게 되고, 다움이 아빠는 이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신장을 팔기로 마음먹지만 간암 말기라서 신장을 팔수가 없자 눈을 팔기로 합니다. 다움이는 골수이식을 하여 건강은 차츰 좋아집니다. 하지만 다움이 아빠의 건강은 나빠지고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고 다움이를 엄마에게 떠나보내고, 아빠는 산속에서 첫 눈 오는 날 기도하는 자세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가시고기의 삶처럼. 우리 시대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각 단어는 고유명사인데, 시대를 반영한 참으로 씁쓸한 신조어가 되었습니다. 이십대는 태반이 백수, 삼십팔세까지 직장 다니면 선방한 것이고, 사십오세 때 정년, 오십대, 육십대에도 퇴사하지 않으면 도둑이라는 뜻이랍니다. 여러분, 남자들이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의 가장, 여러분의 아버지, 여러분의 남편이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뼈 빠지게 일하다가 회사로부터 명예퇴직, 정년퇴직, 구조조정을 당하고 집에 있으면 집의 아내의 눈치를 또 봐야 한다는 사실이 씁쓸합니다. 그래서 이런 유머가 나왔습니다. 영식님, 일식씨, 두식이, 삼세끼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집에서 몇 끼의 밥을 먹느냐에 따라 남편을 부르는 말입니다. 듣고 웃기는 하지만 씁쓸합니다. 왜 남자들이 그런 신세가 되었는가? 이 사회가 남자들의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습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들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건 아닙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아버지를 공경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를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여러분,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밤낮 일하는 일개미 아버지 여러분, 일 열심히 하고 있는 것으로, 뼈 빠지게 땀 흘려 가족을 먹여 살린 것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그것조차도 힘 든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일하고 돈 벌어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역할은 더 많고 더 어렵습니다.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은 아버지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사무엘서에 나오는 엘리 제사장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제사장이었지만 아들들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였습니다. 안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모르지만 아들들이 못된 망나니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엘리 제사장의 가정에서 아버지가 아버지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교육적, 영적 권위가 서지 못했고, 엘리 제사장도 이런 아들들을 책망하고 훈계하려는 노력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결국 하나님께서 그 두 아들을 전쟁에 나가 죽게 하셨고, 엘리 제사장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며느리가 애를 낳다가 죽습니다. 온 집안이 풍지 박산이 났습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가 아버지 역할을 잘못했을 때, 자녀들은 악한 영향을 받게 되고, 그 가정은 불행을 겪게 됩니다.
  인류의 사탄적 사상가가 칼 마르크스를 아시지요? 마르크스는 무신론을 자유의 기본 원리로 정한 공산주의를 만들었습니다. 그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스럽게 살았고, 아직 북한은 지옥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 칼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유대교의 경건주의자였다고 합니다. 칼 마르크스도 아버지를 따라 유대교를 믿는 자녀이었습니다. 하지만 칼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작은 마을로 이사한 다음, 집에 돌아와 폭탄선언을 합니다. “신앙을 바꿔야 하겠다. 루터교로 개종을 하자. 이곳에서는 루터교를 믿지 않고서는 사업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억지로 온 가족이 유대교에서 루터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칼 마르크스에게 이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럼 그동안 믿던 하나님은 누구일까?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 그는 결국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받았던 충격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서도 좌파적인 청년 헤겔파에 소속하면서 무신론적 급진자유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공산혁명을 주도하다 실패한 다음 런던으로 망명, 경제학을 공부하고 유물사관을 정립하면서 ‘신은 죽었다.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정신적인 침체속에 있다가 우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아버지의 가치관 혼돈이 한 자녀의 운명을 바꿨고, 세계사에 있어서는 안됐어야 했을 공산주의를 만들어 고통과 전쟁과 불행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버지의 돈과 사업을 따라 쉽게 바꿔버린 신앙 때문에 칼 마르크스는 신앙을 버렸고, 그 결과 자신도 불행한 마지막을, 국가도, 세계 역사에도 큰 오점을 남겼습니다. 아버지의 역할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교우 여러분, 아버지 여러분, 아버지의 역할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사역을 하는 송길원 목사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무엇이든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더러워집니다. 밥은 밥그릇 안에 담겨 있어야 깨끗하지 방바닥에 굴러 다니기 시작하면 더러워집니다. 잡초도 들에 피어있으면 보기 좋지만 논 한가운데 피면 당장 뽑히고 맙니다. 남편도 아내 옆에 누워 있으면 괜찮지만 아내가 아닌 외간 여자 옆에 누워있으면 이내 더러워집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에 있어야 아름답지 그 자리가 비어 있으면 그것보다 추하고 그것보다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할까요? 아버지가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기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아버지를 ‘도깨비’ 혹은 ‘투명인간’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도깨비처럼 밤에 나타났다 새벽이 되면 사라지거나 투명인간처럼 아예 아버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랍니다. 가정에 아버지의 자리를 아버지가 지키지 못하니까 있어도 없는 것 같고,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물론 청소년들이 입시 공부로 새벽에 학교 갔다가 밤늦게 들어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에는 아버지가 밖에서 퇴근하여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가 “얘들아, 아버지 오셨다! 인사해야지.” 그러면 자녀들이 방에서 나와서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그랬는데, 요즘에는 아버지가 퇴근하여 공부하고 있는 얘들 방해하지 않으려고 방마다 찾아가서 퇴근 인사를 자식들에게 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어머니들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가정에서 공부하는 행위가 예절과 부모공경과 가정 질서보다 위에 있으면 그 집의 앞날과 자녀들이 부모를 어떻게 공경할지가 훤히 보입니다.
  또한 교우 여러분, 아버지가 가족과 함께 시간을 갖기 위해서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최근 미국에서 중산층을 중심으로 “가족 식사 붐”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식사가 유대감을 길러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의 지능과 건강을 향상시켜주고, 탈선을 막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면서 부터랍니다. 하버드 의대 연구진이 미국 1만 육천명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식사습관을 조사한 결과, 아이들은 가족 식사 시간동안에 책을 읽을 때보다 10배나 많은 어휘와 지식을 습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가족과 식사하는 아이들의 탈선 및 비행 확률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10퍼센트라고 조사됐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래 전부터 이 가족식사의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가족들은 식사를 하면서 탈무드를 공부하는데, 어떠한 경우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식탁에서 신앙과 인생 교육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선거에서 당선된 뒤, 자신의 뛰어난 연설 실력을 ‘아버지의 덕’으로 돌렸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아침은 꼭 집에서 먹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식탁에 둘러앉은 아이들이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흐믓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가정에서의 함께 하는 식사는 단순히 허기진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닙니다. 교우 여러분, 가족들이 밥상 공동체에서 화목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여러분, 그 화목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식탁에 있는 아버지 자리를 비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물론 매일 매끼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정해놓고서 꼭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소리 없이 밥만 먹고 끝나지는 마십시오. 또 그렇다고 이 말 저 말 하다가 애들 혼내느라 밥상이 아수라장이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4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본문 골로새서 3장 21절 말씀에도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아버지는 가정에서 영적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자리는 가장의 자리입니다. 영적 가장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남성들은, 각 가정의 아버지들은 진정으로 가장으로서의 영적인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영적인 권위를 갖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가장, 하나님을 바로 믿고 사는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권위는 목소리나 목에 힘을 주거나,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은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가정을 다스리고 가정을 돌보고 가정을 세워가고 가정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영적 질서와 부모의 영적 권위를 위해서 가정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는 아버지! 가정 예배를 드리는 어머니! 가정 예배를 드리는 자녀! 이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정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랑과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가정예배는 하나님께 드리지만 하나님께서 보너스로 주시는 것이 많습니다. 저희 집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가정 예배를 드릴 때 돌아가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훈련도 되었지만, 부모가 기도 중에 “하나님, 사랑하는 우리 아들 누구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그 자녀의 지금의 형편에 맞는 기도를 드리면 물론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이지만, 함께 기도하는 자녀들에게는 부모가 자녀에게 관심과 사랑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부모의 영적인 권위가 세워지고, 가정의 질서가 잡힙니다. 어렸을 때, 어린 자녀들이 아빠의 기도를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분명하게 아빠가 자기들을 위해 기도하신다는 것을, 아빠가 나를 사랑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인 권위를 세우는 것이고, 부모의 축복권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내들은, 각 가정의 어머니들은 가정의 아버지들의 권위를 세워줘야 합니다. 남편의 권위를 자녀들 앞에서 무시하고 깔아뭉개면 자녀들이 엄마가 위대한 존재인 줄 알고 엄마의 권위에 순종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한 번 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렇게 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의 권위가 같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후회하면 늦습니다. 벌써 자녀들은 다 커서, 아버지를 우습게 여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도 우습게 여깁니다.
  본문 18절 말씀,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아내들은 가정에서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라는 말씀입니다.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19절 말씀,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함께 아내를 세워주라는 뜻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고, 남편은 아내를 높여줄 때 부모의 권위가 서고 부모공경이 됩니다.
  남자와 여자의 신체를 연구해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남자와 여자의 성대 길이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목소리를 내는 성대의 길이가 다릅니다. 우선 남자의 성대는 여자의 성대의 길이보다 더 길답니다. 성인 남자는 13-24미리, 성인 여자는 12-16미리라고 합니다. 그 말은 곧 남자가 말을 하려면 여자보다 적어도 2배 정도의 산소가 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정도의 공기가 있어야 성대가 채워집니다. 그러니 남자가 말을 잘 하고 많이 하려면 상당한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말을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공기도 많이 필요하지 않고 어휘력도 남자보다 훨씬 풍부합니다. 그런 근거로 여자들은 말도 잘하고, 말도 많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전화할 때, 귀에 댄 전화기가 뜨뜻해질 때까지 두 시간이 넘도록 수다를 떨고도 전화를 끊을 때는 이렇게 말하면서 끊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다시 하자.” 이런 차이는 다른 데서 생긴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언어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간적으로 남자가 생각해낼 수 있는 단어는, 그 사람의 지식 능력이나 교육에 따라 다르지만, 100단어에서 500단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1000단어에서 많이는 1500단어까지를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부싸움을 시작하면 말로는 남편이 아내를 상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뛰어난 언어 능력으로 가정을 따뜻하게 하고 가족들에게 용기를 주는 일은 남자의 몫이라기보다는 여자의 몫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남자는 가정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내들이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언어의 능력으로 가정을 화목하게 만드시기 바랍니다. 남편들이여, 가정의 아버지들이여, 아내의 말에 짧게라도 추임새를 넣으시기 바랍니다. “그래, 니 엄마 말이 맞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남편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있어요?” “당신네 집 안이 다 그렇지 뭐.” “돈도 제대로 못 벌어다 주면서 왜 큰 소리만 쳐요.” “옆집 아무개 아빠 좀 본받아요.” 이런 말보다 남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십시오. “여보, 사랑해요.” “다시 태어나도 당신밖에 없어요.”  “당신만 믿어요.” 남편 여러분, 아내가 그렇게 말하면 우쭐하지만 말고, 화답을 하십시오. “여보, 사랑해” “당신 안 만났으면 난 큰 일 났을 거야.” “당신하고 사는 게 내게 복이지.”
  자녀들도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빤 왜 돈 없어?” “아빠, 우리는 왜 남보다 못 살아?” “아빠가 나한테 해 준 게 뭐 있어요?” “아빠, 왜 날 낳았어요!” “아빠가 뭘 안다고 그러세요!” “남 보기 부끄럽게 왜 그러세요?” 무엇이 효도이고 무엇이 불효일까요? 부모에게 작은 말 한마디라도 잘 하는 것이 효도이고,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불효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부모를 공경합시다. 아버지를 공경합시다. 아버지를 어머니와 비교하지 마십시오.

  교우 여러분, 오늘은 우리 교단 총회가 제정한 청년주일입니다. 남자 청년 형제들은 훌륭한 아버지가 되도록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여자 청년 자매들은 좋은 아버지가 될 남자를 잘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결혼하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남성 여러분, 아버지 여러분, 훌륭한 아버지 밑에 훌륭한 청년들이 성장하게 됩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청년들이 성장하게 됩니다. 많은 경우 아버지의 폭력이나 잘못된 성격과 말로 상처를 입고, 피해를 입은 남자 청년들이 범죄자가 됩니다. 그것도 이상한 범죄를 저지릅니다.
아버지 여러분, 아버지의 자리를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가장의 역할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영적 권위를 세우십시오. 가정예배를 드리십시오. 아내들은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십시오. 남편은 아내를 높이고,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가정이 회복되길 바랍니다.
2010년 05월 16일
신문수 목사

List of Articles
주일예배 설교
 수치심의 상처
· 일시  2010년 07월 11일
· 말씀  히브리서 12장 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 일시  2010년 07월 04일
· 말씀  베드로전서 2장 9-1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할 때
· 일시  2010년 06월 27일
· 말씀  역대하 20장 1-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 일시  2010년 06월 20일
·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장 7-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위대한 경험
· 일시  2010년 06월 13일
· 말씀  열왕기하 5장 8-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열쇠가 있습니까?
· 일시  2010년 06월 06일
· 말씀  마태복음 7장 7-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머물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
· 일시  2010년 05월 30일
· 말씀  창세기 12장 1-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우리에게 임하시는 성령님
· 일시  2010년 05월 23일
· 말씀  사도행전 2장 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아버지
· 일시  2010년 05월 16일
· 말씀  골로새서 3장 18-2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어머니
· 일시  2010년 05월 09일
· 말씀  잠언 1장 8절~9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어린아이처럼
· 일시  2010년 05월 02일
· 말씀  누가복음 10장 21-2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인생의 퍼즐 조각들
· 일시  2010년 04월 25일
· 말씀  시편 139편 13~1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일시  2010년 04월 18일
· 말씀  요한복음 8장 31~36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자유케 하시는 주님
· 일시  2010년 04월 11일
· 말씀  요한복음 8장 31-3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첫 번째 부활절
· 일시  2010년 04월 04일
· 말씀  요한복음 20장 1-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 사랑의 확증
· 일시  2010년 03월 28일
· 말씀  로마서 5장 6~1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 일시  2010년 03월 21일
· 말씀  마가복음 14장 32-4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 일시  2010년 03월 14일
· 말씀  로마서 3장 23~26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십자가의 도
· 일시  2010년 03월 07일
· 말씀  고린도전서 1장 18-2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삶의 방식
· 일시  2010년 02월 28일
· 말씀  요한복음 15장 5-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인생의 멘토가 있습니까?
· 일시  2010년 02월 21일
· 말씀  에베소서 4장 11-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힘써 지켜야 할 것
· 일시  2010년 02월 14일
· 말씀  에베소서 4장 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교회
· 일시  2010년 02월 07일
· 말씀  로마서 14장 17-2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함께 하나님을 기쁘시게
· 일시  2010년 01월 31일
· 말씀  로마서 14장 13-2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멈추십시오
· 일시  2010년 01월 24일
· 말씀  누가복음 10장 38-4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믿음이 없이는
· 일시  2010년 01월 17일
· 말씀  히브리서 11장 5-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을 기쁘시게 II
· 일시  2010년 01월 10일
· 말씀  시편 51편 16~19절 말씀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을 기쁘시게
· 일시  2010년 01월 03일
· 말씀  요한복음 8장 29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마십시오
· 일시  2009년 12월 31일
· 말씀  잠언 4장 20~27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 일시  2009년 12월 27일
· 말씀  역대하 32장 24-3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성탄예배 설교말씀
· 일시  2009년 12월 25일
· 말씀  (본문을 기재해 주세요)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기다려 주시는 은혜
· 일시  2009년 12월 20일
· 말씀  이사야 30장 18~22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