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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들어가는 가정  [3978]
· 설교 일자 : 2009년 05월 10일
· 본문 말씀 : 에베소서 5장 21절
· 설교 :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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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들어가는 가정 (에베소서 5장 21절)
  1852년 4월 10일 미국의 한 시민이 알제리에서 사망했습니다. 그후 31년이 지난 뒤 미국 정부는 군함을 보내 그의 유해를 본국으로 운구했습니다. 유해가 뉴욕에 도착하던 날 부두에는 뉴욕시가 생긴 이래 최대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대통령과 국무위원, 수많은 시민이 운구행렬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날의 주인공은 정치가도,장군도, 위대한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시민이었습니다. 과연 무엇이 그 평범한 시민의 운구행렬을 지켜보기 위해 수많은 시민들을 운집케 했을까요?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집 내 집뿐이리.” 원제목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이라는 노래 가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즐거운 나의 집’으로 잘 알려진 명곡입니다. 미국의 극작가이자 배우인 존 하워드 페인이 작사했습니다. 그가 이 노래의 가사를 지은 것은 프랑스 파리에서 동전 한 푼 없는 처량한 신세였을 때였습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집도 없이 길거리를 떠돌았습니다. 그는 1851년 3월 3일 친구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가정의 기쁨을 자랑스럽게 노래한 나 자신은 아직껏 내 집이라는 맛을 모르고 지냈으며 앞으로도 맛보지 못하고 말 것이오.”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1년 후 길거리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바로 그 존 하워드 페인의 운구행렬을 보며 슬퍼하려고 대통령과 국무위원과 수많은 시민들이 모였던 것입니다. 미국 국민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그 가사가 노래를 부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가사를 작사한 사람은 집도 없이 길거리를 떠돌다 죽었다니 참으로 기구하고, 안타깝습니다.
  존 하워드 페인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좋은 노래 가사를 만든다고 홈 스위트 홈, 즐거운 나의 집, 행복한 나의 집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즐거운 가정, 행복한 가정을 원하고 그리워하는 것만으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따뜻하게 하는 말이 3가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어머니라는 말, 또 하나는 천국이라는 말이고, 또 하나는 가정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 개의 말이 가정 안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가정은 행복의 공작소입니다. 행복을 만들어내는 곳이란 말입니다. 가정은 안식처입니다. 미국의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행복한 가정은 천국의 지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천국이 행복의 본점이라면, 행복한 가정은 천국의 지점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양정동 몇 번지 천국지점입니까? 여러분이 사는 동의 주소로 된 천국지점이 되었습니까?
  가정의 달을 맞아 참으로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것은 결혼한 지 20년 이상 된 부부들의 이혼이 급증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20년을 같이 산 의리를 봐서라도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되는 데 말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데는 기본적으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어려운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 21절,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은 앞 뒤 구절들 사이에게 경첩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말씀입니다. 경첩아시지요? 여닫이문을 달 때 한쪽은 문틀에, 다른 한쪽은 문짝에 고정하여 문짝이나 창문을 다는 데 쓰는 철물입니다. 두 개의 물건을 연결시키는 물건이지요. 에베소서 5장은 20절까지는 성령의 영향력 아래 사는 삶과 지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21절 말씀 다음으로 이어지는 내용은 22절부터 33절까지는 남편과 아내에 대해 말씀하고 있고, 그 다음 장인 6장 1-4절까지는 부모와 자녀, 5-9절까지는 종과 상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가 21절속에 담겨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말과 태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경외에서 우러나는 자발적인 상호 복종으로 그 성령충만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설명하면,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뜻을 성부 하나님께 복종시키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며, 그리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은 “서로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행복한 가정, 가정 천국을 만들기 위해 가족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복종이라는 말을 별로 안 좋아하시지요? 현대인들에게 복종은 구시대적인 단어이고, 자기의 개성과 주장과 자존심을 다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 복종이라는 단어가 위압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잘못 사용되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쓸 당시 여자와 아이들, 종들은 그 가정의 머리에게 복종해야 했습니다. 종들은 자유케 되기까지 복종해야 했고, 아이들은 장성하기까지 복종해야 했고, 여자들은 일평생 동안 복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에게 서로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복종하는 것은 질서와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가정 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할 때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풀러신학교에서 가족학을 강의하던 잭과 주디 볼스윈은 저서 [크리스천 가정]에서 오늘날의 모든 가정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전통적 가정’과 ‘현대적 가정’ 그리고 ‘성경적 가정’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세 가지 유형의 가정을 나눈 기준이 ‘권위’였다는 것입니다.
전통적 가정은 권위가 가장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경우인데, 그 결과 엄격한 질서는 존재하지만 그 대신 가족 구성원들의 자유가 희생되는 일이 많다고 지적합니다. 과거 유교적 가치관에 근거한 우리 사회 대부분의 가정들이 이런 전통적 가정입니다. 현대적 가정은 전통적 가정과 정반대의 경우입니다. 현대적 가정은 권위가 부재한 가정으로,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개성과 자유를 만끽하는 대신 질서가 상실되고 혼란과 갈등을 겪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대적 가정들의 모습을 적지 않게 주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콩가루 가정이 되기 쉽습니다.
  잭 볼스원은 이 두 가지 극단을 대처하는 건강한 가정의 대안으로 ‘성경적 가정’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성경적 가정에서의 권위는 누구에게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주인 되어 다스리시는 가정에서는 질서와 자유가 공존하는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라고 그는 제시합니다. 성경적 가정 안에서 자녀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인 부모를 존중하며, 동시에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로서의 부모들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권위를 사용하여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합니다. 이런 가정 안에서 우리는 따뜻한 질서와 절제된 자유를 동시에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이 가정 안에 하나님의 권위가,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중심이 되어야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정들 중에 하나님께 복을 받고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의 약속을 믿음으로 누린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신약성경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은 성경적인 가정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그의 가정은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가정이었습니다. 그 가정의 가장인 고넬료는 하나님 중심으로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고, 기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부정부패를 일삼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군인이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왔습니다. 그 지위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거나 포악하게 굴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족들에게 존경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 신앙적인 모습이, 경건한 모습이, 존경받는 모습이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고, 그래서 그가 사도 베드로가 그의 집에 방문했을 때에는 자기 가족 전체뿐만 아니라 친척, 친구들까지 고넬료의 말을 듣고 다 모일 정도로 그는 신실했고, 관계도 좋았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의 설교를 들을 때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준 모범적인 가정이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가정 안에서의 서로 복종하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동기가 되어 서로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만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5장 24절에,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는데, 복종을 한다는 것은 복종할 다스림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스림이 있을 때 거기에 복종을 하든지, 반항을 하든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다스린다는 뜻은 정복의 개념보다는 잘 안내하고, 보호하고, 돌보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잘 안내하고, 보호하고, 돌보는 다스림을 행할 때에 서로 복종해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고,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에게 예수님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서로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자세입니다.  
  상담목회를 하는 어떤 목사님에게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처지에 놓인 부부가 하루 밤을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잠시 남편이 자리를 뜨자 부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 남편은 말이 없어요. 애써 내게 감추려고 하지만 그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나는 알아요. 목사님께서 기회를 보아 남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남편은 진실한 사람이예요.” 부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말했지만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상황이 바뀌어 남편과 목사님이 둘이서만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편이 입을 열었습니다. “요즘 일이 안 되어서 아내는 퍽 기분이 우울한가 봐요. 목사님께서 틈을 보아 제 처를 좀 위로해 주세요.” 하지만 목사님은 다음날 아침까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부부와 헤어지기 전에 딱 한마디만 했습니다. “당신네 부부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서로 자기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 주는 한 당신들은 어떤 난관도 헤쳐 나갈 겁니다.” 이런 부부의 모습이 서로 복종하며 사는 부부에게서 나올 수 있는 ‘함께 만들어가는 행복한 가정’입니다.
  요즘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에 아내는 남편을 잘 위로해주고, 격려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복종입니다.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내의 선한 마음을 잘 알고 아내를 존중할 때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부부가 되고, 자녀들 앞에서 서로 복종하는 좋은 본을 보이는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을 헐뜯거나 무시하거나 돈 벌어오는 기계 취급하지 마십시오. 남편들이여, 아내를 무시하고 하녀 취급하지 마십시오. 교우 여러분, 행복한 부부가 되고, 가정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 서로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불효자는 부모가 만든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그런 말에 동감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는 자녀를 많이 낳았습니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자녀가 없지만, 그래도 부모가 자녀들을 골고루 사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저만 하더라도 6남매 중 위로부터 4번째, 아들로는 두 번째이고 바로 밑에 여동생과 2년 차이가 나니까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차례가 오질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껏 배라도 아파야 그때서야 어머니의 갈라진 손바닥으로 제 배를 문질러주셨습니다. 감기몸살이라도 걸려야 어머니의 사랑의 손길이 내게 닿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중 많은 분들이 그렇게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하나밖에 안 낳으니까 한 자녀에게 모든 것을 다 쏟아 붓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 결과 부모사랑이 차고 넘쳐서 자녀들이 사랑 비만에 걸려있습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주는 법을 배우지 못해 애정과다후유증에 걸렸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요즘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잘못 사랑하면서도 바르게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를 왕자로, 공주로 키웁니다. 그 왕자와 공주들에게 부모는 시종들이고, 시녀들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어렸을 때부터 왕자병, 공주병 환자가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섬기거나 부모를 섬기는 훈련이 안 되어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아이로 자라납니다. 늘 그렇게 받기만 했으니 부모는 의례 시종 노릇, 하인 노릇을 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그러니 자랄 때 부모 공양법을 모르고 대접받는 법만 배운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어찌 부모 공양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식 가르치려고 모든 것을 팔아 뒷바라지해서 명문대, 일류대를 졸업시켰건만, 부모를 안 모신다고 하고 골방 하나 얻어주고 개밥 주듯 생활비 몇 십 만원 주면서, 찾아가기 어려운 이름의 아파트에 살면서 집에 안 와주는 부모가 일등 부모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가문의 영광이며 우리 집 기둥이라고 하지만 그 기둥이 부모를 배신합니다. 대접 받고만 자란 아이에게 부모 모시는 법을 안 가르쳤으니 부모 공양을 안 하는 것이지요. 그 책임이 부모에게 없느냐는 말입니다.
  어느 글에 보니까, 인터넷에 어떤 아버지가 자기 딸에게 보낸 편지가 올라와 있어서 씁쓸한 마음으로 인용하였더군요. “가빈아, 저번에 니가 노래를 불러 주었잖니? ‘아빠, 힘내세요. 가빈이가 있잖아요.’라고. 이 노래 제목이 ‘아빠, 힘내세요’라고 하더라. 근데 가빈아, 아빠가 진짜 힘든 게 뭔지 아니? 아빠가 진짜 힘든 건 바로 너 때문이야. 우선 한 달 놀이방비가 25만원이라고 하더라. 이게 말이 되니? 6개월로 계산해 보자. 순순히 놀이방비만 해도 150만원이더구나. 거기다가 간식비, 견학비, 책값, 니가 대학생이니? 아빠는 요즘 미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그러니 가빈아, 앞으로 아빠 앞에서는 그런 노래를 하지마라라. 니가 노래 부르면 무슨 돈 벌어 오라는 주술소리로만 들린단다.” 여러분, 이 글을 읽으면서 ‘뭐 이런 아빠가 다 있어? 그렇게 생각이 되십니까? 이 아빠 말이 이해가 되기도 하면서, 그렇다고 이런 말을 대 놓고 하기엔...사실 요즘 부모들이 자녀들 때문에 등골이 휘지 않습니까? 힘든 거는 분명합니다. 이 시대의 자녀들이 부모님의 입장을 조금만 이해하려고 해도 가정 분위기가 매우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왕자, 공주 의식도 가지게 할 뿐만 아니라 하인자세도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피차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녀가 됩니다.

  어버이주일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못 났어도, 부모는 부모입니다. 부모의 몸을 통해서 여러분의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의 은혜로 자라났기 때문에 은혜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십계명 중에 사람에 관계된 첫 계명이 제5계명인데,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부모를 공격하라가 아니고 공경하라 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할 만하거든 공경하라가 아니고 부모이기 때문에 공경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을 어기는 것은 죄악을 범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1장 18절 이하에 보면, 자녀가 완악하고 패역하여 부모 말에 계속 순종하지 않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말하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여서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에베소서 6장 1-3절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말씀대로 순종하고 말씀대로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가정에서 부모의 영적 권위를 세워 질서 있고 조화로운 가정을 이루기 위한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가정예배는 부모의 영적 권위를 세워줍니다. 특별히 아버지의 영적 권위를 세워줍니다. 물론 오직 영적 권위를 세우기 위한 방편으로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 예배는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함께 갖고 나누는 중요한 만남입니다. 가정예배는 복 받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사는 가정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통로입니다. 시간을 정해 놓고 가족 모두가 그 시간에 우선순위를 맞추어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면 가정천국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배 형식보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가정천국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권위 앞에 모두 모이는 것입니다.
  가정예배를 통해서 가정에 변화가 시작되었고, 가장의 권위가 서게 됐다는 고백들이 있습니다. “교회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가정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일정한 형식 없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지만 이 시간을 통해 아이들의 신앙이 자라고 저희 부부도 손을 한 번 더 잡게 되네요.”(황은주, 34세, 여) “시작은 어려웠지만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대화가 늘었습니다. 둘러앉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도 발견했구요.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김선민 46세)

   교우 여러분, 가정예배를 시작하십시오. 가정예배를 회복하십시오. 시작하려면 쑥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시작하십시오. 가정예배는 특별한 형식이 없습니다. 찬송, 기도, 성경을 읽으면 됩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가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거룩한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가정예배 안에서는 목사도, 장로도, 안수집사도, 권사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가족만 있을 뿐입니다. 가정예배를 통해서 특별히 아버지의 영적 권위가 서게 됩니다. 무리하게 권위를 세우려고 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 아버지로써, 가장으로써, 부모로써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하나님께 복종하십시오. 그리고 자녀들도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니까 가정의 권위의 중심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의 권위 앞에 남편도, 아내도, 부모도, 자녀도 각기 복종하고, 누가 누구에게 예속되거나, 열등하거나,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각각의 사명으로 자기 역할을 다해 함께 가정천국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가운데 가족이, 혹은 남편이, 또는 부모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가정은 온 식구가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가정이 되도록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함께 가정 천국을 만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009년 05월 10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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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야학교
· 일시  2009년 08월 02일
· 말씀  신명기 8장 1~10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 일시  2009년 07월 26일
· 말씀  에베소서 4장 17-2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믿음의 반응
· 일시  2009년 07월 19일
· 말씀  히브리서 11장 6-12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입니까?
· 일시  2009년 07월 12일
· 말씀  빌립보서 3장 12~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영원한 생명을 얻으십시오
· 일시  2009년 07월 05일
· 말씀  요한복음 3장 16-2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것들
· 일시  2009년 06월 28일
· 말씀  고린도전서 3장 10~1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찾아내기까지
· 일시  2009년 06월 21일
· 말씀  누가복음 15장 8-1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
· 일시  2009년 06월 14일
· 말씀  사도행전 7장 54~60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생수의 강
· 일시  2009년 06월 07일
· 말씀  요한복음 7장 37-3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성령님 임재하소서 !
· 일시  2009년 05월 31일
· 말씀  에베소서 5장 15~1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시련을 이겨내는 사람
· 일시  2009년 05월 24일
· 말씀  야고보서 1장 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