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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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교회 홈페이지와 YouTube 채널을 통하여 설교말씀과 강의를 영상/음성/스트리밍으로 제공해 드리고 있습니다. 2004년 8월 부터, 현재까지의 영상과 말씀 음원파일을 홈페이지를 통해 열람이 가능하며,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설교말씀 다시보기를 통해, 예배시간에 받았던 은사와 감동을 다시한번 회고하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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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신 - 하나님의 전신갑주 (V)  [4259]
· 설교 일자 : 2009년 04월 19일
· 본문 말씀 : 에베소서 6장 13~17절
· 설교 :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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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신 - 하나님의 전신갑주 (V) (에베소서 6장 13~17절)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재미교포 출신 남자 연예인 중 한 사람은 미국에 있을 때에 편의점 같은 곳에서 점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답니다. 저녁 시간에 그 가게에 강도가 들어왔답니다. 총을 들이대며 가방에다가 돈을 담으라고 해서 꼼짝 없이 계산기에 있는 돈을 담아 주었답니다. 그랬더니 배가 고팠던지 핫도그를 하나 만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핫도그도 벌벌 떨면서 만들어 주었더니 핫도그를 받아들고서 곧 바로 나가더랍니다. 그런데 돈 가방을 두고 그냥 가버린 것입니다. 그 강도가 처음 강도짓을 하는 바람에 돈 가방을 그냥 놔두고 핫도그만 들고서 빨리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도망간 것입니다. 그 장면이 가게 안에 설치된 CCTV에 다 찍혔습니다. 경찰에 신고를 했더니 경찰이 하는 말이 핫도그 먹은 것 가지고는 잡아들일 수가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 덕분에 그 멍청한 강도는 강도짓을 하긴 했지만 구속되지는 않았답니다. 강도가 돈 가방을 잊고 가는 것은 괜찮은 일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살 세상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세상은 하나님 나라, 천국이라는 것, 그리고 그 천국에 가기까지 천국백성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를 천국 백성으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공격하는 대적자들, 사탄, 마귀, 악한 영들이 있다는 것, 그들과 맞서 싸워 승리하지 않으면 우리는 악에게 지고 만다는 것, 그리고 그 영적 전쟁에 꼭 챙겨야 할 것, 꼭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 전쟁에 나가는 군사가 꼭 착용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영적 군사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최상의 재료의 최고의 품질로 만든 군사장비들을 우리들에게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각 장비들은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그리고 오늘 말씀드릴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된 신입니다.
  군인에게 있어서 신은 단지 걸어 다니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적군이 길에 놓아둔 함정이나 덫으로부터 발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또한 언덕이나 미끄러운 곳을 오를 때에 미끄러지지 않고 전진할 수 있으려면 그에 맞는 신을 신어야 했습니다.
  “내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로 유명한 나폴레옹이 그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을 넘어가야 할 때, 알프스를 넘느냐 넘지 못하느냐는 그들의 사기와 군기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신발이 어떤 신이냐에 따라 달라졌을 것입니다. 나폴레옹 군대는 사철 만년설로 뒤 덮인 알프스 산을 넘어야 하는 데 만약 그들의 신발이 눈 위에서 미끄러지는 신이라면 알프스 산을 넘어 진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대 전쟁의 백병전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적의 공격에 밀려 넘어지거나 뒤로 밀리지 않기 위해서 군인은 발을 잘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군인은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특수 가죽신이나 군화를 신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밑창에 징을 박고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특수한 신을 신었습니다. 이 신은 전투에서 기동성을 줄 뿐만 아니라 더 멀리 그리고 더 빨리 앞으로 전진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백병전을 할 때는 땅에 신발을 박고 자리를 굳게 지켜 밀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밀리지 않도록, 미끄러지지 않도록, 우리의 발이 보호되도록 신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평안의 복음의 신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꼭 신어야 할 신은 복음이라는 신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을 하면서 꼭 신어야 할 신은 평안의 복음의 신입니다. 그렇다면 ‘평안의 복음의 신’이라고 할 때,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신다는 것이 곧 복음 아닙니까? 이 화평케 하는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평안, 하나님의 샬롬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믿기만 하면! 받아들이기만 하면 받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 이 복음을 “평안의 복음”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평안의 복음으로 준비된 신은 예수님께서 만드신 신입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이봉주 선수의 마라톤화는 특별 제작된 신발였습니다. 이봉주 선수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약 7,000만원의 연구개발비가 투입된 신발을 신고 달렸는데 당당히 대회 2연패를 이루어냈었습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신고 달린 신발은 이봉주 선수의 경기력 향상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 할 수 있도록 제작된 신발로 이봉주 선수의 신체적 데이터를 기준으로 계속된 협의를 거쳐 문제점을 보완하였답니다. 베이징올림픽 현지의 기후와 코스 특징을 고려함과 동시에 각 선수의 취향에 맞게 소재나 모양을 조정한 것이 특수화의  주요특징이다. 특수화의 가장 큰 특징은 신발 바닥소재에 혼합된 ‘쌀겨’입니다. 미끄러운 도로가 많은 베이징의 마라톤 코스에서 ‘쌀겨’는 비로 인해 노면이 젖을 경우 미끄러짐을 방지할 수 있는 효과를 준다고 합니다. 물집 발생을 억제하는 소재로,  황사 등, 베이징 특유의 모래가 슈즈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조직이 세밀한 소재를 사용했고, 또한 온도와 습도가 높은 베이징 현지 날씨를 감안하여 장시간 달려도 쾌적한 신발내부 환경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기술과 자원이 동원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평안의 복음의 신은 예수님께서 만드신 신입니다. 이봉주 선수의 신에 많은 투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투자도 우리 발에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게 하려고 지불된 가격과 비교하면 이봉주 선수의 신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의도하셨고, 무한한 지혜로 구상하셨으며, 예수님의 보혈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시고 성령님의 무한한 능력으로 깨닫게 하신 복음을 믿는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어 주시면서 까지 주신 복음, 구원의 도, 천하보다도 귀한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과 사랑으로 만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평안의 복음의 신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맞서 싸워야 하는 전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 발에 맞게 지어 주신 귀중한 신발입니다. 공짜로 주셨습니다. 믿는 자에게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주십니다.

  먼저 우리가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여러분, 이런 단어를 누리고 싶지요? 화해, 화목, 화평, 평안, 평온, 평정, 평강, 평화, 하나님과의 평화, 사람들과의 평화, 자기 마음속의 평화! 이 모든 것을 누리고 싶으시지요?
  그런데 사탄은 우리의 화목, 평안, 평화를 깨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걱정, 불안, 두려움을 줍니다. 걱정하게 하고, 불안케 하고, 두려움을 갖게 하여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평안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화목케 지지 않으면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화목할 때 평안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 없이 온전한 평화를 누리려고 하는 것은 마치 구름 없는 하늘에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영혼을 불안하게 하고, 짖 누릅니다.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사람은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영혼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짓 평안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코가 막혀서 냄새를 못 느낀다고 냄새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근심, 불안, 두려움, 절망, 죄와 죽음의 문제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근심과 불안으로 흔들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하신 줄을 알지 못한 채, 두려움과 절망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평안할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들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주신 부활의 복음은 평안을 주는 복음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평안을 갖게 해 줍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평안하십니까? 평안하지 않다면 무엇 때문입니까? 평안하지 않다면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서 여러분의 마음과 삶에 파도치고, 소용돌이치는 일들을 다스리시도록 예수님께 여러분 자신을 맡기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은 우리들이 누리는 평안은 어떤 평안입니까?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나를 보호해 주십니다. 날 도와주십니다. 날 인도해 주십니다. 날 승리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평안합니다. 복음은 모든 악한 것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나는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또한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으며, 승자의 편에 서 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장 되신다는 것을 믿기에 우리 안에 확신이 있고, 담대함이 있고, 자신감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예수를 믿기로 하고, 그동안 집에 붙였던 부적, 섬기던 우상의 물건들, 책들을 처리하는 것을 겁을 냅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크고 능력이 있으시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세력과 온갖 악한 영들과 마귀,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막 믿기 시작한 분일지라도 예수님을 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로마서 1장 16절에 말씀했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지, 믿은 지 오래 된 사람들에게, 상당히 신앙이 꽤 좋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능력이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믿기만 하면 주시는 능력입니다.
  군화가 군인들을 제반 함정에서 보호해 주듯이 평안의 복음의 신은 많은 시험과 핍박으로부터 반드시 성도들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순종하여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썼던 그 시대에는 신을 신는다는 것은 어떤 자격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노예나 죄수들은 신을 신지 않았습니다. 노예나 죄수나 전쟁 포로에게는 쇠사슬이 그들의 발을 묶었습니다. 신을 신는다는 것은 자유인이라는 뜻입니다. 신을 신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 벤허에서 보면, 배 밑에서 노를 젓는 노예들이 배가 가라앉을 때 발이 쇠사슬에 묶여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서 발목이 잘라지거나 물에 빠져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신을 신는다는 것은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하여 움직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이란 말씀은 복음을 따라 살겠다는 결단을 마음에 내린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복음은 평안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과 평화하고 사람 사이의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믿고 복음 따라 사는 사람은 평안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 불화를 일으키고, 직장에서 불화를 조장하고, 교회에서 불화를 일으키고, 이웃들과 화평을 깨는 사람은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복음을 잘못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분쟁의 복음, 불화의 복음을 받은 것입니다. 사실 그런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이 될 수 없지요. 그리스도인들은 평안의 복음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다녀야 합니다. 우리의 발자국이 남는 곳에 평안의 발자국을 남겨야 합니다. 걸어가면 신발 밑 무늬 자국이 남지 않습니까? 우리가 서 있는 곳, 걸어간 곳에는 “평안”이라는 자국이 남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발자국입니다.
  우리 마음이, 여러분의 가정에, 우리의 공동체에 평안이 깨지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사탄, 마귀들입니다. 사탄은 그것을 즐깁니다. 사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주일예배를 통해서 여러분이 평안을 얻기를 바랍니다. 주일예배에 나와서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얻고, 새로운 은혜로 충만해져서 세상 속으로 가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주일오전예배를 드리고, 오후찬양예배를 드릴 때까지 교회 여기저기에 모여 앉아서 무슨 이야기 하십니까? 혹시 모여서 땅이 꺼지는 소리나 하고, 툴툴 거리며 불평, 불만, 원망의 소리나 하고, 다니면서 숙덕대는 소리, 이간질 하는 소리, 비방하는 소리, 헛소문이나 만들고, 수군거리는 것 등은 평안을 만드는 소리가 아니라 평안을 깨는 소리입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2장 20절의 말씀을 보면,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리는 것도 죄라고 말씀하신 것을 아십니까? 로마서 1장 28-32절에 보면, 수군수군하는 것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말씀합니다. 어째든 이런 것들은 평안의 복음이 아니라 평안을 깨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의 말소리를 하나님이 듣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민수기 14장 28절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평안을 만드는 말을 하면 평안을 주실 것이고, 평안을 깨는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평안이 깨지도록 행하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왜 교회에 다닙니까? 왜 복음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이 좋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믿기 전하고 믿은 후하고 뭐가 다릅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대답할 말을 준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분명한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교리적으로,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장황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분명한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지, 예수님 믿기 전에는 내 인생이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 절망, 우울, 허무가 있었는데 예수 믿으니까 내가 이렇게 달라졌다는 것, 내 안에 세상에서 얻지 못한 평안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평안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평안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의 신을 신으라는 말씀은 우리의 인생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행군하는 군인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는다는 것은 평안의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길이 되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52장 7절에,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나훔서 1장 15절 상반절에도,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평화를 전하는 자의 발은 아름다운 발입니다.
여러분은 이 평안의 복음을 어떻게 들었습니까? 이 평안의 복음을 어떻게 전해 받았습니까? 이 평안의 복음의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누군가 여러분에게 전한 사람이 있어서 그 분에서 듣고, 받고 믿게 되지 않습니까? 대동강변에 들어온 배를 타고 토마스 선교사와 같은 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외친 분, 사영리 전도지를 들고 전한 분, 전도지를 나누어 준 분, 여러분이 그렇게 애를 먹이고, 매몰차게 굴어도 여러분의 영혼을 사랑하여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한 분이 있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습니까? 평안의 복음을 전하는 그들의 아름다운 발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저주 아래 있지 않고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지 않았습니까? 복음에 빚진자임을 깨닫고,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발이 복음을 전하는 발이 되어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과 상대한 싸움이 아니고, 이 어두움의 권세자들과 하늘의 악한 영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영적 싸움은 곧 복음을 전해서 사탄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 하나님께 잃어버린 영혼들, 우상과 사신에 매여 사는 사람들, 세상의 헛된 것의 욕망에 빠져 사는 사람들, 멸망의 길로 죽기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평안의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평안의 복음을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는다는 것은 마귀와의 대적에서 적극적인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 세상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믿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십시오. 평안을 만들며 사십시오. 평안의 복음을 전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려내고, 이 세상에 소망을 주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009년 04월 19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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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생명을 얻으십시오
· 일시  2009년 07월 05일
· 말씀  요한복음 3장 16-2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것들
· 일시  2009년 06월 28일
· 말씀  고린도전서 3장 10~1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찾아내기까지
· 일시  2009년 06월 21일
· 말씀  누가복음 15장 8-1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
· 일시  2009년 06월 14일
· 말씀  사도행전 7장 54~60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생수의 강
· 일시  2009년 06월 07일
· 말씀  요한복음 7장 37-3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성령님 임재하소서 !
· 일시  2009년 05월 31일
· 말씀  에베소서 5장 15~1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시련을 이겨내는 사람
· 일시  2009년 05월 24일
· 말씀  야고보서 1장 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