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영상

sermon

양정교회 홈페이지와 YouTube 채널을 통하여 설교말씀과 강의를 영상/음성/스트리밍으로 제공해 드리고 있습니다. 2004년 8월 부터, 현재까지의 영상과 말씀 음원파일을 홈페이지를 통해 열람이 가능하며,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설교말씀 다시보기를 통해, 예배시간에 받았던 은사와 감동을 다시한번 회고하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등록된 설교영상 : 1,956
왜 그럴까요?  [3303]
· 설교 일자 : 2009년 02월 15일
· 본문 말씀 : 로마서 6장 15-23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신문수 목사님의 다른 말씀 보기

왜 그럴까요? (로마서 6장 15-23절)
  운동선수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연봉이 삭감되는 것을 두려워할 것 같지요? 아니랍니다. 구단에서 퇴출될까 하는 두려움도 아니랍니다. 팬들에게 인기가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운동선수들은 ‘슬럼프’를 가장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끝도 없는 이 슬럼프가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가? 이렇게 하다가 내 인생이 여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두려워한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럼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다 씁니다. 슬럼프에 빠지면, 야구 선수 같으면 마이너리그로 내려가고, 축구선수 같으면 2부 리그로 내려갑니다. 그들은 그곳에 가서 무엇을 할까요? 야구선수 같으면 가장 기본인 배팅연습을 합니다. 축구선수 같으면 드리블, 트래핑, 슈팅 등 기본연습을 합니다. 골프선수 같으면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번 드라이브 연습을 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부터 무엇이 문제인지를 찾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신앙의 슬럼프를 겪고 있다면, 왜 그럴까? 를 물어야 합니다. 쉽게 유혹에 넘어가고, 죄를 지어도 죄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만약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말, 무정하고 무자비한 생각과 말, 악한 생각과 악한 말이 더 잘 나온다면 왜 그럴까요? 여러분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찾기 어렵고, 희망을 가졌다가도 쉽게 희망이 사라집니다. 쉽게 낙심합니다. 삶의 기쁨도 없습니다. 감사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지도 않습니다. 쉽게 분노하고, 쉽게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에 빠집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열등의식, 콤플렉스, 부정적인 자화상을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너무도 쉽게 상처받습니다. 그 상처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원인을 찾아야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강원도 태백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삼수령이라는 큰 고개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시작된 근원이 세 곳으로 갈라져 서쪽으로는 금대봉 산기슭의 검룡소에서 한강으로, 남쪽으로는 태백시내의 황지에서 낙동강으로, 동쪽으로는 태백 인근 통리의 미인폭포에서 오십천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삼수령이라고 부른답니다. 우리는 같은 근원의 물이 아주 작은 차이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서 나중에는 전혀 다른 강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들, 삶의 모습들을 거슬러 올라가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찾아 다시 방향을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이런 문제의 근원이 죄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이 누구에게나 종으로 내맡겨서 복종하게 하면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죄의 종이 되거나, 아니면 의로움에 이르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여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죄란 단순한 범죄행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죄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하와에게 접근하면서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고 하와의 마음을 조금씩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와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는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기면 죽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뱀은 “천만에, 절대로 죽지 않아! 하나님이 그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너희가 그 열매를 먹고 난 뒤에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까봐 그런 거야!” 그 말을 듣고 난 하와의 마음이 심하게 움직이더니 결국 그만 따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했습니다.
  이 타락사건은 단지 열매를 먹었다 안 먹었다는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탄이 뱀을 통해서 아담과 하와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벌려 놓으려는 유혹에서부터 시작하여 결국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켰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은 단순히 어떤 장소에서 쫓겨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이 곧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 없이 나 자신이 독립을 하려고 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 죄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뒤에 사탄이 찾아와 시험한 사건을 잘 아실 것입니다. 사탄은 금식으로 인해 시장하신 예수님께 시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로 빵을 만들어 먹어봐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시험 속에 사탄의 어떤 유혹과 계략이 있는 줄을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에,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단호히 대답하셨습니다. 둘째 시험은 예수님을 거룩한 도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한 번 아래로 뛰어내려 봐라.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서 네 발을 다치지 않게 감싸 땅에 착지 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단호히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하셨으니 나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또다시 사탄은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면 예수님께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나는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섬기겠다!” 그러자 사탄은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결국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하여 하나님과 관계에 틈이 생기게 한 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도록 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하여 마침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게 합니다.
목양실에 있는 공기청정기를 향해 리모컨을 아무리 눌러도 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리모컨의 건전지가 다 되었나 보다고 생각하여 건전지를 갈아 끼웠습니다. 그리고 리모컨을 눌렀는데도 공기청정기는 작동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 생각되어 공기청정기의 코드를 확인해 보니 코드가 콘센트에서 빠져있었습니다. 코드가 빠지니 공기를 정화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과의 관계의 코드를 빼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코드가 빠지면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작동이 안 되기 때문에 공기를 정화할 수 없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가 되어 하나님과 함께 하며 교제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것이 있어야 사람으로서의 제 구실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분리되면 그 때부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의 코드가 빠져있으면 거기에서부터 인생의 문제가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지난 한 주는 세계적으로 불의 주간이었습니다. 호주에서 발생한 산불은 900여 가구 전소, 200억불 피해, 사망자 300명에 달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중국 베이징에서는 지난 9일, 중국중앙방송국 신축 사옥의 부속 건물인 문화센터(44층)가 1시간 만에 완전히 다 타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월대보름을 맞이하여 창녕 화왕산에서 억새풀 태우기를 하다가 강한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그곳에 참석한 사람 4명이 불에 타 죽고, 불을 피하다거 화상을 입거나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안전 불감증이 사고 원인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더 근본적인 사고 발단은 억새풀을 태워서 한 해의 액운을 막고, 무슨 복을 비는 행사라고 하는데, 오히려 화(火)가 화(禍-재앙)를 불렀습니다. 액운을 막는 것이 아니라 액운이 완전히 달라붙은 것입니까? 복을 빌러 갔는데 웬 복이 그런 복이 있습니까? 불장난하는 애들에게 어른들이 ‘불장난하면 오줌 싼다’고 했는데, 불장난하는 어른들은 오줌 갖고 댈 일이 아닙니다. 이 화왕산 사건은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과 멀어지고 대적하게 되면,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하게 되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믿고 의지하는 점점 어처구니없는 짓을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없는 인생들이 불장난하여 복을 얻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의 결과로 화를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그 결과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가 귀찮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이기적인 자기사랑 속에 살아갑니다. 자기중심적인 자아는 곧 욕심, 탐욕으로 나타나고, 또한 육신적인 삶을 좋아합니다. 그리하여 본능적인 삶을 삽니다. 식욕, 정욕 등을 만족시키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낙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이런 자기중심적, 이기적인 성향은 자기 자신을 잘못 사랑합니다. 이 죄의 본성은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사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채 사랑을 하려고 하니까 불완전한 사랑, 병든 사랑, 잘못된 사랑, 지나친 사랑, 삐뚤어진 사랑을 하면서도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이 이 내용과 관계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자아를 부인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자아를 버리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오, 참 인간이십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있었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놓은 죄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에 죄 용서받음과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개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로 막힌 담이 무너져 화목케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다시 회복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생명, 공급해주시는 영의 양식, 공급해주시는 힘, 공급해주시는 은혜로 영혼이 풍성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런 풍성함을 날마다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근원적인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사람이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복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죄를 짓게 되는 데, 그 때마다 죄를 용서받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그냥 죄를 쌓아두면, 죄는 우리 안에서 점점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죄의 영향력을 강화합니다. 죄의 목표는 우리를 죄의 지배아래 두고 마음대로 주물러 마침내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유혹이라는 수단을 사용합니다. 유혹은 우리 안에 이미 잔존하고 있는 죄의 경향성을 자극하여 범죄하고자 하는 욕구를 갖게 합니다. 그리고 이 유혹에 굴복하여 죄를 범하게 되면 그만큼 우리 안의 죄의 경향성은 강한 힘을 얻게 됩니다. 아주 작은 죄를 지었지만 그 죄가 점점 커져서 죄를 지어도 잘 모르고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래서 죄를 암과 같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죄가 점점 커져서 죽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사람의 영혼 전체를 불법적으로 지배하려고 합니다. 영혼은 지, 정, 의의 인격뿐만 아니라 마음과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결국 죄가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면 그의 마음과 뜻과 성품과 삶 전체에 대하여 죄가 지배력을 갖게 됩니다.
  죄의 지배의 목적은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영혼을 자기 지배아래 두려고 하고, 마침내 멸망시켜 삶을 비극으로 끝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죄가 사람을 공격하여 양심에 갈등을 일으키게 하고, 그 다음 양심을 어둡게 만들고 무디게 만듭니다. 양심이 화인 맞은 것처럼 양심이 그 기능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더욱 심해지면 인면수심 즉 얼굴은 사람인데 속은 짐승인 인간이 되기도 하고,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됩니다. 이 일을 사탄이 죄를 통해 합니다. 오늘날 발생하는 끔찍한 범죄가 그 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가 주관하는 삶, 또는 죄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은 죄의 방향으로 자동항법장치가 되어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동항법이란 비행기가 자동으로 원하는 항로를 따라 운항하도록 맞추어진 대로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것을 말합니다. 죄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먼저 죄를 짓는 쪽으로 반응을 합니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반응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반응합니다.
  사람은 아담의 후예이기 때문에 죄에 감염된 채 태어납니다. 그것을 타락한 인간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죄의 경향성, 죄성, 죄의 본성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더 반응을 잘합니다. 선한 것보다 악한 것에 더 반응을 잘 합니다. 아이들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이런 인사를 가르치면 금방 못 배웁니다. 또 시켜도 또다시 시켜도 잘 못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놀이터에 가서 욕이나 이상한 말은 한번만 듣고 와도 곧 바로 합니다.  아이들이 나쁜 짓은 얼마나 잘 따라하는 지 모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닙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간 속에 있는 죄의 본성 때문입니다. 나쁜 버릇도 그렇습니다. 좋은 버릇을 겨우 들여 놓았다가도 순식간에 좋은 버릇을 어디가고 나쁜 버릇이 생깁니다. 아이들만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안 좋은 것, 나쁜 것, 해로운 것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어도 잘만 합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목사님인데, 그 분은 말을 할 때에 콧방귀를 킁킁합니다. 그 교회 교인 중에는 설교시간에 킁킁을 몇 번 하는가 세어보는 교인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을 흉내 내던 교인이 순식간에 자기고 킁킁하는 버릇이 들어서 그것을 고치느라 혼났답니다. 남 흉보다가 그 흉을 담습니다. 장점을 배우기 보다 단점을 더 쉽게 배웁니다.
  2월 8일 지난 주일저녁 늦은 시간에 MBC스페샬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했습니다. 내용은 우리사회의 말, 소문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내용 중에, 두 개의 집단을 가지고 실험한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한 집단에는 어느 스타의 좋은 소문, 즉 ‘누가 부모 없는 아이를 입양했다더라’는 소문을, 다른 집단에는 어느 스타의 안 좋은 소문, 즉 ‘어느 스타가 자살했다더라’는 소문을 퍼뜨렸는데, 좋은 소문은 전해 듣고 전하다가 중간에 흐지부지 해졌습니다. 그런데 나쁜 소문은 빠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갔습니다. 좋은 소문은 같은 시간에 100명 중 20명이, 나쁜 소문은 100명중 80명이 다 알게 되었습니다. 좋지 않은 소문이 좋은 소문을 듣고 퍼뜨린 속도와 양이 4배나 빨랐습니다. 안 좋은 것, 못된 것은 얼마나 잘 감염되고, 확산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죄의 능력은 사람의 생각을 공격합니다. 왜냐하면 죄가 행해지려면 사람의 마음의 동의가 필요한데, 생각은 마음으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에 죄는 사람의 생각을 공격합니다. 죄가 생각을 타고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 마음속에는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찹니다. 이처럼 죄의 바이러스가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주어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면, 우리의 말이 바뀝니다.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불평하는 말을 합니다. 원망하는 말을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반드시 부정적인 말로 표현됩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말을 할 때에 우리의 마음은 믿음을 잃게 됩니다. 믿음보다는 의심과 불신을 선택합니다. 쉽게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움을 갖습니다. 이렇게 믿음을 잃어버린 마음과 영혼에는 희망이 깃들지 못합니다. 꿈이 없습니다. 비전을 품지 못합니다. 희망을 이루고자 하는 용기도 생기지 않습니다. 쉽게 낙심과 체념과 절망합니다. 절망의 늪에 빠져 나올 생각을 하지 않다가 결국 극단적인 행동을 합니다.
다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구원받고 예수님의 새 생명을 받아 새 사람이 되었는데도 우리는 죄를 짓게 됩니다. 또한 죄는 회개하여 하나님께 용서받았는데 나의 옛 습관이 변하지 않아 다시 죄를 짓든지, 다시 옛 생활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말씀합니다.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속적으로 우리가 과거에 죄의 지배아래서 살아갈 때의 구습을 버려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의지하여 날마다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다스려 주셔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해야 합니다. 찬양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예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면,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하면,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있으면, 우리의 생각이 부정적인 생각으로 향하지 않게 됩니다. 죄를 향하지 않습니다. 갔다가도 다시 바로 잡습니다. 마치 나침반의 원리와도 같습니다. 나침반은 자석바늘의 양쪽이 지구의 북쪽과 남쪽을 일정하게 가리키는 원리입니다. 자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바늘을 움직여도 다시 방향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죄가 여러분 속에 자리 잡지 않도록 회개하고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케 되기를 바랍니다. 죄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과 말을 지배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성령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2009년 02월 15일
신문수 목사

List of Articles
주일예배 설교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
· 일시  2009년 12월 13일
· 말씀  디모데후서 3장 15-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세 종류의 삶
· 일시  2009년 12월 06일
· 말씀  역대하 24장 15-2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인생
· 일시  2009년 11월 29일
· 말씀  마태복음 25장 14-3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용서의 지우개
· 일시  2009년 11월 22일
· 말씀  에베소서 4장 31절 ~ 5장 2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선물이 되는 말
· 일시  2009년 11월 15일
· 말씀  에베소서 4장 29-3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혀로 던지는 부메랑
· 일시  2009년 11월 08일
· 말씀  에베소서 4장 27-3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감사가 주는 선물
· 일시  2009년 11월 01일
· 말씀  골로새서 3장 15-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실망이라는 지뢰
· 일시  2009년 10월 25일
· 말씀  시편 42편 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후회의 비탈길
· 일시  2009년 10월 18일
· 말씀  고린도후서 7장 8~1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툴툴 탓 탓
· 일시  2009년 10월 11일
· 말씀  빌립보서 2장 14-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우상을 만들지 말라
· 일시  2009년 10월 04일
· 말씀  신명기 4장 15~24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염려를 주께 맡기라
· 일시  2009년 09월 27일
· 말씀  베드로전서 5장 7~9절 말씀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스트레스를 관리하십시오
· 일시  2009년 09월 20일
· 말씀  요한복음 14장 25-2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숨은 지뢰
· 일시  2009년 09월 13일
· 말씀  야고보서 4장 13-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일어나 벧엘로 올라갑시다
· 일시  2009년 09월 06일
· 말씀  창세기 35장 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깨어짐의 은혜
· 일시  2009년 08월 30일
· 말씀  창세기 32장 24-3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사닥다리
· 일시  2009년 08월 23일
· 말씀  창세기 28장 10-2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네 발로 밟은 땅은 !
· 일시  2009년 08월 16일
· 말씀  여호수아 14장 6~12절
· 설교  이동훈 목사
   
주일예배 설교
 광야학교(2)
· 일시  2009년 08월 09일
· 말씀  신명기 8장 1-1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광야학교
· 일시  2009년 08월 02일
· 말씀  신명기 8장 1~10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 일시  2009년 07월 26일
· 말씀  에베소서 4장 17-2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믿음의 반응
· 일시  2009년 07월 19일
· 말씀  히브리서 11장 6-12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입니까?
· 일시  2009년 07월 12일
· 말씀  빌립보서 3장 12~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영원한 생명을 얻으십시오
· 일시  2009년 07월 05일
· 말씀  요한복음 3장 16-2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것들
· 일시  2009년 06월 28일
· 말씀  고린도전서 3장 10~1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찾아내기까지
· 일시  2009년 06월 21일
· 말씀  누가복음 15장 8-1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
· 일시  2009년 06월 14일
· 말씀  사도행전 7장 54~60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생수의 강
· 일시  2009년 06월 07일
· 말씀  요한복음 7장 37-3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성령님 임재하소서 !
· 일시  2009년 05월 31일
· 말씀  에베소서 5장 15~1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시련을 이겨내는 사람
· 일시  2009년 05월 24일
· 말씀  야고보서 1장 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항상 기도 하십시오
· 일시  2009년 05월 17일
· 말씀  에베소서 6장 18~20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함께 만들어가는 가정
· 일시  2009년 05월 10일
· 말씀  에베소서 5장 2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