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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부활절  [3034]
· 설교 일자 : 2010년 04월 04일
· 본문 말씀 : 요한복음 20장 1-18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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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부활절 (요한복음 20장 1-18절)
  예수님 부활에 관한 재미있는 유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다음날, 예수님을 새 무덤에 장례를 치른 아리마대 요셉에게 친구가 핀잔을 주었습니다. “자네 미쳤어? 그렇게 비싼 돈을 들여 만든 무덤을 십자가형 당한 죄수에게 주다니.” 아리마대 요셉이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괜찮아 예수님이 주말에만 잠깐 쓰고 돌려주시겠다고 했거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아리마대 요셉이 준비해 놓았던 무덤을 잠깐 사용하시고 돌려 주셨습니다. 시간상으로 보면, 금요일 오후 3시에 운명하시고 저녁 무렵에 장례를 지내셨으니 주일 새벽까지 만으로 이틀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무덤에 계셨습니다. 날짜로는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 아침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에게 부활의 기쁨과 능력이 새벽공기처럼 여러분들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어떤 감격이 있었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내용입니다. 부활의 첫 목격자인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첫째로,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가 목격한 것은 바꿔진 무덤이었습니다.
  이 무덤이 저 무덤으로 바꿔진 것이 아니라 무덤의 상황이 바꿔져 있었습니다. 무덤이 죽은 시신의 무덤으로 있지 않고, 무덤이 빈 무덤이 되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주일 새벽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도착하는 장면에서 부활 사건을 시작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부활의 핵심적인 증인입니다. 실제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예수님의 주변인물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일곱 귀신이란 도덕적으로 망가진 매우 방탕한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고, 귀신으로 인한 매우 심각한 정신병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여자의 신분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이런 점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의 목격을 성경에 기록한 것을 생각해 봅시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거짓으로 꾸미거나 거짓 증인의 목격담을 기록해 놓으려고 한다면,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훨씬 더 당시 사회에 영향력이 있고, 신빙성을 줄 말한 사람을 내세워 목격했다고 꾸며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 그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보게 된 것은 무덤의 돌문이 옮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장례 관습에 의하면 죽은 사람은 동굴 무덤에 매장됩니다. 원반 모양의 돌로 무덤 입구를 막아 짐승과 강도로부터 시신을 보호합니다. 입구를 막아 놓은 돌은 남자 장정 여러 명이 있어야, 혹은 수십명이 있어야 함께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의 돌문이 옮겨져 무덤이 열려있었습니다. 무덤에 접근 못하도록 경비병들이 밤새 지켰는데 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이 빈 것을 보고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단정을 짓습니다. 당시 무덤 도굴은 흔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은 이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릴 만큼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었는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빈 무덤을 보고 곧 바로 누군가 훔쳐갔다고 단정을 지었습니다. 도둑이 든 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덤이 비어 있을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를 알리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갔습니다. 두 사람은 즉시 일어나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무덤 안을 본 요한은 매우 중요한 단서를 목격합니다. 예수님의 머리를 감았던 수건이 몸을 감쌌던 천들과 따로 개켜져 놓여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본문 6,7절에,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예수님을 장사지냈던 무덤 안은 사흘 전과는 상황이 바뀌어졌습니다.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 칙칙하고 어둡고 음산한 죽음의 무덤이 아니라 빈 무덤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을 싸고 있었던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이 따로 정리되어 놓여있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시체 도굴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시체를 훔치는 사람들이 세마포와 수건을 일부러 풀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시체를 훔쳐가는 사람들이 제정신이라면 발가벗긴 시체를 들고 돌아다닌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냥 들고 가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설사 무슨 이상한 습성이 있어 수건을 풀었다고 할지라도 차분하게 접어 한 곳에 놓아두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려고 억지를 부리는 후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면 수의가 그곳에 있을 리가 없고, 그것도 쌌던 대로 놓여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명백한 부활의 증거를 빈 무덤 안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이 목격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돌문이 열린 것, 빈무덤, 수의와 수건이 정리되어 있는 점, 이런 단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더욱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이 바뀌어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빈무덤을 보고 가버린 뒤에 막달라 마리아는 홀로 남아 울고 있었습니다. 본문 12절부터 18절까지는 홀로 남은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일어난 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마냥 울고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도 슬프고 통곡할 일인데, 이제는 장례 지낸 시신을 누가 훔쳐갔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슬픔이 솟구쳐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한 슬픔의 눈물은 그쳤지만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진 것 때문에 다시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가 탄식하는 말을 내뱉었다면 이런 말들을 쏟아내었을 것입니다. “이런 몹쓸 사람들, 이런 나쁜 사람들,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다니... 너무해... 정말 너무해... 아! 예수님을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한 것도 모자라 시신까지 훔쳐다가 어떻게 하려구?”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마냥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무덤 밖에 서서 흘리는 눈물은 불신의 눈물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고, 믿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혼자서 서럽게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곳에 찾아오셨습니다. 더 이상 슬픔의 눈물 속에 빠져 있지 않도록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15절에,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처음에는 예수님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너무도 눈물을 계속 흘리고 있었기 때문인지 예수님을 곧 바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니까 그제서 알아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슬픔의 눈물이 기쁨의 눈물로 바뀌었습니다. 감격의 눈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는 시편 30편 5절 말씀처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는 시편 126편 5절 말씀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님을 만나게 된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의 눈물을 기쁨의 눈물로 바꿔주셨습니다. 이사야 25장 8절에,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는 말씀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말씀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슬픔과 근심과 불신과 낙심과 절망의 눈물을 씻기어 기쁨의 눈물로 바꾸어 주십니다. 감격과 환희의 눈물로 바꾸어 주십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슬픔이 있습니까? 인생의 여정에서 슬픔을 만나셨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주님으로 인하여 슬픔이 기쁨으로 바꿔지기를 바랍니다. 한숨이 탄성으로 바꿔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의 노래가 바뀌어졌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 막달라 마리아의 입에서 나왔던 말들은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부활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의 시신이 도난당한 줄 알고 계속 예수님의 시신을 찾는 말만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에게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서는 “내가 주님을 보았다.”고 다른 제자들에게 전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입에서 나온 고백은 “없네, 못 찾겠네, 모르겠네”라는 한숨과 탄식과 슬픈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을 보았다”는 고백으로 바뀌었습니다.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내가 주님을 만났습니다.”는 고백으로 바뀌었습니다.
  오페라로 이 장면을 연출한다면 어떤 곡조, 어떤 멜로디의 노래로 내용이 진행될까요?
한숨과 탄식에 곡조를 담으면 애가가 됩니다. 기쁨과 감격과 환희의 소리에 곡조를 담으면 찬양이 되고 축가가 되고 기쁨의 노래가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막달라 마리아의 가슴속에서 쏟아져 나오던 슬픔의 노래가 기쁨의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탄식의 노래가 환희의 노래로, 죽음의 노래가 생명의 노래로, 장례의 노래가 부활의 노래로, 절망의 노래가 희망의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한숨의 노래가 감격의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허무의 노래가 복음의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고 부활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이 부를 노래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가슴속에서 나오는 노래가 부활의 예수님으로 인해 바꿔지기를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나오는 말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나오는삶의 고백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나오는 노래가 바뀌어야 합니다. 시편이나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새 노래로 찬양을 해야 합니다. 우울하고 쓸쓸하고 어둡고 부정적이고 정욕적이고 세상적인 노래가 우리의 입에서 흘러나와서는 안 됩니다. 기쁘고 즐겁고 밝고 긍정적이고 영적이고 소망있는 노래가 흘러나와야 합니다.
  여러분, 박종관의 “대중가요 노랫말과 가수의 삶의 상관성 분석”이라는 글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그 글에서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가 그들의 삶이되더라고 분석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가수가 한 노래를 히트시키려고 하면 못 불러도 5,000번 이상을 부른다는데, 그만큼 많이 부르고 그만큼 가사에 맞는 감정을 이입시켜서 정열을 다해 노래하는데 인생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사의 찬가”를 불렀던 윤덕심은 현해탄에서 애인과 함께 동반자살을 했고,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렀던 차중락은 낙엽 따라 가버렸고, “마지막 잎새”를 불렀던 배호도 젊은 날에 그렇게 죽었고, “눈감아 드리외다”를 불렀던 남인수도 그러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산장의 여인”의 권혜경은 투병하다가 산사에서 죽어 갔으며,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의 생도 눈물에 뒤덮인 생을 살았다는 것이 박종관의 주장입니다.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예를 들어 “산장의 여인”이라는 노래는 그 노래말이 어떤 내용입니까?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 나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이런 노래를 계속 부르다 보면 그런 인생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박종관씨의 주장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연산동에 가수 김광석 추모 공연 프랜카드가 붙어있더군요. 그 통키타 가수 김광석씨도 자살했습니다. 그의 노래가 슬픈 사랑의 노래들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노래를 부르십니까? 그냥 유행하는 노래입니까? 여러분의 가슴속에서 나오는 말이나, 고백이나 노래가 어떤 것이냐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노래를 부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노래를 부르면서 살아가느냐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생명의 노래, 부활의 노래, 희망의 노래, 살리는 노래, 위로의 노래, 긍정의 삶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첫 번째 부활절에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다음해 부활절에도 그 감격의 고백과 노래가 끊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맞고 있는 부활절은 어떤 부활절입니까? ( 2010 부활주일 영상을 잠시 보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첫 번째 부활절에, 막달라 마리아는 탄식으로 시작했습니다. 절망과 한숨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슬픔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의 삶을 바꾸셨습니다. 그의 눈물을 바꾸셨습니다. 그의 고백과 노래를 바꾸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 그 후에 12제자들, 그리고 5백여 형제들, 야고보, 모든 사도들,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새로운 믿음의 세계가 활짝 열렸습니다. 슬픔과 허무와 절망의 삶이 아니라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그들도 부활할 것을 믿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은 우리의 삶을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부활의 눈을 뜨기를 원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2010년 부활주일 아침에 첫 번째 부활을 맞았던 막달라 마리아처럼 불신이 믿음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죽음이 생명의 노래로 바꿔지길 바랍니다.
2010년 04월 04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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