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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지우개  [4179]
· 설교 일자 : 2009년 11월 22일
· 본문 말씀 : 에베소서 4장 31절 ~ 5장 2절
· 설교 :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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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지우개 (에베소서 4장 31절 ~ 5장 2절)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거부당하고, 구박 받고, 무시당하고, 버림받고, 상처받고, 모욕을 당했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준 사람을 미워하고 분노하게 되고, 증오심으로 가득 해 되갚아 주고 싶습니다. 그 사람을 부셔버리고 싶습니다.
머리로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용서하기가 싫습니다.  
  용서하는 것은 너무도 힘듭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용서가 쉽게 됩니까? 부모가 자식을 용서하는 것은 쉬울 수 있습니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모니까 자식을 용서합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친구에게, 남편이나 아내에게, 내가 사랑하던 사람, 이웃이나 직장상사나 동료에게 상처를 받고, 고통을 당하고, 모욕과 억울한 누명이 씌워지고, 배신이나 치명적인 공격을 당했을 때, 쉽게 용서할 수 있었느냐 말입니다. 우리는 용서하라는 말을 들으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를 용서하라 구요? 농담하십니까? 그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 알고서 그런 말을 합니까?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용서하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 중의 하나가 미운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냥 미운 정도가 아니라, 자신에게 행한 것을 보면 견딜 수 없고, 증오와 복수심이 펄펄 끓어오르게 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너무도 힘든 일입니다.
누가 용서를 쉽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가 쉽다고 하는 사람은 아마도 진정한 용서를 한 것이 아니고 머리로만 한 용서일 경우가 분명합니다. 여러분, 정말 용서가 쉽게 됩니까? 아니지요.
  우리가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하면, 우리의 내면에서는 자꾸만 용서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존심이 용서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마치 용서해주는 것이 내 자존심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용서하는 것이 상대에게 지는 거라고 느껴집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계속 자극하여 상대방을 미워하고, 분노하고, 증오하고, 복수하고 끝까지 갈 때까지 가보라고 합니다. 철저히 복수하는 것이 네가 승리하는 것이고, 그래야 너의 속의 미움과 분노가 해결된다고 속삭입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않은 채 살아가다보면,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그 사람, 그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속에서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미움의 불꽃이 더 커져 증오의 활화산이 폭발하여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용암이 끌어 흘러넘칩니다. 용서할 수 없는 그 사람의 목소리와 비슷한 목소리가 들려도, 헤어스타일, 뒷모습, 그가 입었던 옷과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만 보아도 내 속에 있는 응어리가 울컥합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준 바로 그 사람과 관계된 장소를 지날 때, 내가 당한 그 사건이 일어난 계절이 찾아와도, 그 사건과 그 사람과 관계된 온갖 특징들 중 하나만 연결되거나 겹쳐지거나 연상되어도, 미움과 분노와 증오의 감정은 마구 우리의 마음을 휘저어 놓습니다. 그래서 그 생각 때문에 다른 것이 집중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너무도 힘든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 용서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된 사람은 새 마음을 품는 것이 당연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부모에게 바른 행동을 배우고 익히듯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행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이 용서하라는 말씀에 대해 우리는 “왜 용서를 해야만 합니까?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됩니까?” 라고 강하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복수만 하지 않고 용서는 하지 않고 살아가면 안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실까요?
  용서하지 못하여 우리 안에 품게 되는 미움과 분노는 마음을 파괴하는 파괴자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정신적인 요소가 바로 '미움'과 '분노'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미움을 갖고 있으면 소화가 안 되고 잠이 안 오고 심장이 뛰고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의사가 의학협회에서 미움과 분노는 심장마비를 일으킨다고 늘 가르치며 분노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어떤 토론 모임에서 자신의 이론에 반대하는 사람과 맞서 불같이 화를 내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내 안에 미움과 분노를 해결하지 않으면 미움과 분노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치명적으로 파괴합니다. 죽음으로까지 몰고갑니다.
  여러분, 연산군을 아시지요? 연산군은 어린 시절부터 사랑도 제대로 못 받은 채 엄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성장하여 어머니의 죽음의 비밀을 알고부터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일순간에 얼어붙었던 분노와 억압된 감정이 폭발하면서 광기를 부리고 많은 사람을 살해했습니다. 그러고는 마치 대포를 쏜 뒤에 반동이 있는 것처럼, 자신을 망가뜨리며 자포자기하고, 더욱 더 방탕한 삶으로 치달았습니다. 결국은 몸도 마음도 추스르지 못한 채 무책임한 삶을 살다가 폐위를 당했습니다. 미움과 분노와 용서하지 않은 자의 종말을 보여주는 역사의 사건입니다.
  용서를 하지 않고 살면 누가 더 피해자일까요? 누가 더 고통스러울까요? 누가 더 불행할까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미움과 분노를 품고 산다면 정작 우리가 더 심한 상처를 받게 됩니다. 미움과 원망과 분노와 복수심은 날카로운 칼과 같습니다. 이것을 품고 있으면 미움의 대상보다 자신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미움과 분노는 결국 자신을 향한 원망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미움의 대상을 향하던 분노가 결국 우리 자신을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여러분, 분노와 증오심과 스트레스가 암세포를 키우는 영양분이라는 것을 아시지요? 마음속에 쌓인 분노와 원한이 몸의 각종 신경성 질환과 관절염, 편두통, 불면증, 고혈압과 같은 질환의 원인이라는 것을 아시지요? 울화병이 생기면 결과가 어떤지 아시지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미움과 분노와 증오와 복수의 화살을 쏘아대면, 그것이 미움의 대상에게만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미움도 부메랑입니다. 분노도 부메랑입니다. 미움과 분노의 부메랑을 조심하십시오. 미움과 분노의 부메랑이 자신에게 돌아 날아오지 않도록 경계하십시오.
교우 여러분,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병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느 날 여러분의 집에 낯선 사람이 들어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집으로 들어올 때 따라 들어왔는지, 이미 들어와 있었는지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 안에서 여러분을 졸졸 따라다니며 여러분의 생각과 생활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 때문에 도무지 집안일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신경이 쓰여서 편히 쉴 수도 없습니다. 전화가 와서 전화를 받을 때에도 그 사람이 신경이 쓰이고, 방 청소를 할 때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옷을 갈아입을 때에도, 여러분과 동거를 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해 증오심을 품고 살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는 미움이라는 집을 짓게 됩니다. 그 미움이라는 집안에는 내가 가장 미워하고 증오하는 그 사람의 생각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 너무도 싫습니다. 그 사람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 너무도 싫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죽이고 싶은 복수심의 칼을 갑니다. 그럴수록 그 사람은 내 마음 속의 미움의 집에 완전 터를 잡고 삽니다. 내가 그 미움의 집을 허물지 않는 이상, 나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내 삶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이 그 미움의 집을 내 마음속에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미움의 집은 내가 지은 것이고, 그 집을 허물 수 있는 사람도 나 자신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속의 미움의 집에 들어와 사는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의 방을 분양받아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어떤 분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할 때, 미움의 집을 내 마음 속에 짓는 것이 아니라 미움의 감옥을 짓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내 마음 속의 감옥에 가두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감옥 안에 갇힌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정신과 의사인 맥 밀란은 “어떤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그의 노예가 되고 만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그 사람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고 때로는 분노가 일어난다면,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거나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 누군가에게 노예상태가 된 것입니다. 미움이라는 감정의 노예가 된 것이고, 미움의 대상에게 묶여져 포로가 된 것과 같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으로 인한 감정의 노예가 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겉은 멀쩡하게 걸어 다니고 활동을 하는 것 같아도 과거에 묶여 살고, 과거의 사건과 상처와 고통을 준 용서하지 못한 그 사람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마음속의 미움의 집을 허물어 버려야 합니다. 미움의 대상 때문에 내가 노예처럼  묶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5절,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6장 14,15절,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서 내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합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는 우리 안에 남아 우리의 영을 더럽힙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용서하지 못해 갖고 있는 미움과 분노와 그것으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해 사탄의 만만한 공격대상이 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무엇이 취약점인지, 무엇을 건드리면 쉽게 화를 내고, 실수하고, 죄악을 범하는 지를 너무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용서하지 않음으로 있는 미움과 분노와 증오와 죄를 발판으로 하여 지속적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미움과 분노는 사탄의 먹거리입니다. 벌레와 쥐에게 음식쓰레기가 먹이이고 서식처이듯이 사탄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우리는 사탄의 포로가 됩니다. 사탄의 점령지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약화되고, 죄책감을 갖게 되고, 기도도 잘 안 되고, 기쁨도 사라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영적 질식 상태에 이릅니다. 그래서 거칠고 삐딱하고 강팍한 사람이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에게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실까요?
  용서는 자신의 과거를 바꾸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우리가 바꿀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용서는 쓰라린 기억을 감사의 기억으로, 비겁한 기억을 용기 있는 기억으로, 노예이던 기억을 자유로운 기억으로 바꾸어 놓는다. 용서는 누군가가 말살시킨 자존감을 회복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서는 과거의 망상을 산산이 부서뜨린 후 미래에 대한 희망을 탄생시킨다.” 루이스 스미디스가  쓴 [용서의 미학]이라는 책에 말한 내용입니다. “용서란 포로를 풀어주고 보니, 그 포로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즉 용서는 과거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의 주범에게 노예처럼 얽매여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미움의 감옥에서 석방하는 일입니다. “용서란 나에게 상처를 주는 과거로 돌아가 기억 속에서 그 과거를 재창조함으로써 새출발을 하는 것이다.”고 말합니다. 용서라는 지우개로만이 과거의 상처와 고통을 지울 수 있습니다. 잊으려고 한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수를 포기한다고 해서 상처와 고통이 지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용서의 지우개로만 지우고 바꿀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상처받고 고통스러운 과거를 용서하십시오. 용서의 지우개로 과거를 바꾸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은혜가 임합니다.
  용서는 앙갚음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앙갚음할 권리를 포기하면 그동안 미움과 증오로 쏟아 부어졌던 에너지가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치유로 바뀌어져 사용됩니다. 미움과 증오와 분노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잠을 편하게 자게 됩니다. 용서는 치유로 건너가게 하는 다리입니다. 용서는 우리 자신이 사는 길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의 수많은 질병이 용서함으로 치유가 시작됩니다.
  박 자람이라는 청년은 미국의 유명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유수한 콩쿠르에서 여러 번 입상하고 보스턴 오페라단 가수로 인정받아 활동하다가 군 입대를 위하여 귀국했습니다. 군에서 뇌의 해마가 손상되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치명적인 사고를 당해서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서 회복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성악 하는 사람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니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절망 속에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중에 말씀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13장 1,2절 말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그는 자유로운 미국생활을 하다가 군대에 들어오니 이해할 수 없는 제약과 압박이 있었는데 자신이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뜨겁게 회개하고 결심했습니다. 불치병 판정을 받은 토요일에 군법회의가 열렸습니다. 자신의 삶을 완전히 망쳐버린 사람들을 죽이도록 미웠기에 도저히 용서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군법회의에서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을 용서하겠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성악하는 사람이 목소리를 잃었으니 절망적인 삶이 그에게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제대후, 어느 날 청년부 예배에서 형제자매들에게 이 기가 막힌 환경을 간증하며 너무 너무 찬양하고 싶다고 고백하며 울었습니다. 청년부원들이 모두 함께 울었습니다. 그러자 청년부원들이 쇳소리가 나는 찬양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것이라고 격려하며 찬양을 해보라고 응원했습니다. 박자람 형제는 용기를 내어 찬양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 하시며” 탁하고 쇳소리가 나고 높은 음에서는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찬양을 하는 오페라 가수였던 당사자는 얼마나 괴롭고 애처로웠겠습니까? 찬양을 듣는 청년들의 표정도 애처로웠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사건이 터졌습니다. 1절을 마치고 2절을 부르는데 점점 목소리가 변하더니 찬양이 아름다운 오페라 가수의 목소리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불치 진단을 받고 조금 전까지 쇳소리가 나왔는데 하나님이 말씀대로 살며 용서할 수 없는 이들을 용서하고 말씀에 순종하니 찬양하는 짧은 시간동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에 순종하여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을 용서한 박 자람 형제의 목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에 병들고 상처난 곳에 치유가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십자가의 의미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 진정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갚아도 갚아도 영원히 못 다 갚을 죄의 빚과 사랑과 용서의 빚을 동시에 진 자입니다. 크기로 말하면 가장 큰 용서를 받았습니다. 무게로 말하면 가장 무거운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여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명령하십니다.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형편없는 우리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용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용서의 충분한 동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고, 나는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용서하라고 명령하시니까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할 것인지, 용서하지 않을 것인지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노란색 티셔츠를 살까, 빨간색 티셔츠를 살까 하고 선택하는 것과 다른 일입니다. 거짓말을 할 것인지 하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용서하지 않으면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달아 용서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는 자기만이 짊어지어야 할 자기 십자가입니다. 용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때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닮는 것입니다. 용서하기가 너무도 괴로워서 몸부림칠 때, 빌라도의 관정에서 39대의 채찍에 맞으며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온 몸이 뒤틀리고, 움켜쥔 손을 부르르 떠시며 견디어 내신 예수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는 시간입니다. 용서하기 위해 나의 자아를 죽일 때, 골고다 언덕위에서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게 느껴질 때,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다 용서해 주었다. 너희는 무엇을 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는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선택과 결단으로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여러분의 감정이 용서해 줄 수 있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감정에 앞서 용서의 의지를 가지고, 용서하기로 결단을 하고 실천하여 감정이 따라오게 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용서는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으로 용서했다고 해서 정말 마음속에서 지우개로 지우듯이 한 번에 지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과정입니다. 용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완전하고 진정한 용서는 일시적인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지워나가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으로 용서하겠다고, 용서했다고 한 후에, 또 다시 어떤 상황에 맞부딪히면 기억이 납니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다시 기억이 납니다.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우리는 내가 용서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자책합니다. 아닙니다. 용서가 한 번에 쉽게 이뤄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용서하기 위해 시간도 필요하고 용서했더라도 온전히 용서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코리 텐 붐 여사만큼 용서에 관한 진리를 생생하고 체험적이며 절절하게 잘 보여주는 예도 없을 것입니다. 코리 텐 붐 여사는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에서 모욕과 굴욕을 견디며 전쟁을 견뎠습니다. 특히, 알몸으로 소독을 할 때 간수들이 곁눈질로 여성 죄수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눈길이 굴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코리 텐 붐은 이 모든 지옥같은 시간을 견뎌냈고, 하나님의 은혜로 소독실을 지키던 악마같은 사람들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코리 텐 붐은 사람들에게, 모든 유럽 사람들에게 용서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 네덜란드 블루멘달에서, 미국에서, 또 어느 주일은 독일 뮨헨에서도 용서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마친 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네, 여사님, 여사님 말씀대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코리 여사는 순간 그의 얼굴이 기억났습니다. 그 얼굴은 소독실에서 곁눈질하던 음란하고 조롱이 가득했던 나치 친위대 간수의 얼굴이었습니다. 코리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코리 여사는 다 용서한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자기 앞에 멀쩡히 서 있는 간수를 보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치심과 충격 가운데서 코리 여사는 기도했습니다. “주님, 용서해 주세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는 저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용서하는 사람으로 유명해진 자신이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내면이 드러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용서를 다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갑자기 굳어있던 손이 눈 녹듯 풀어졌습니다. 얼음장 같던 증오가 녹아내렸습니다. 코리 여사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느꼈고, 그리고 그를 용서했습니다.
  비록 남을 용서하고자 하는 결단이 우리 마음속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할 수 있는 힘은 우리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와 신뢰로써,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겸손히 인정하며 주님께 의지할 때만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고,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십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를 우리들에게 주시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정신병에 걸리거나 아니면 세상을 복수의 아수라장으로 만들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라는 선물을 거저 받았기에 거저 나누어줘야 합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성품중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아버지 하나님을 닮으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기 원한다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닮아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용서하지 않고도 마음이 편안하십니까? 미움도 분노도 원한도 복수심도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해 몸에 병이 생기고 마음과영이 고통을 겪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위해 용서하십시오. 여러분, 요셉의 용서를 기억하십시오. 다윗의 용서를 닮으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깨달으십시오. 미움과 분노와 복수심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배우십시오. 가장 소중한 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의 지우개로 과거의 상처와 고통을 지우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09년 11월 22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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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2010년 07월 04일
· 말씀  베드로전서 2장 9-1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할 때
· 일시  2010년 06월 27일
· 말씀  역대하 20장 1-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 일시  2010년 06월 20일
·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장 7-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위대한 경험
· 일시  2010년 06월 13일
· 말씀  열왕기하 5장 8-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열쇠가 있습니까?
· 일시  2010년 06월 06일
· 말씀  마태복음 7장 7-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머물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
· 일시  2010년 05월 30일
· 말씀  창세기 12장 1-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우리에게 임하시는 성령님
· 일시  2010년 05월 23일
· 말씀  사도행전 2장 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아버지
· 일시  2010년 05월 16일
· 말씀  골로새서 3장 18-2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어머니
· 일시  2010년 05월 09일
· 말씀  잠언 1장 8절~9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어린아이처럼
· 일시  2010년 05월 02일
· 말씀  누가복음 10장 21-2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인생의 퍼즐 조각들
· 일시  2010년 04월 25일
· 말씀  시편 139편 13~1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일시  2010년 04월 18일
· 말씀  요한복음 8장 31~36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자유케 하시는 주님
· 일시  2010년 04월 11일
· 말씀  요한복음 8장 31-3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첫 번째 부활절
· 일시  2010년 04월 04일
· 말씀  요한복음 20장 1-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 사랑의 확증
· 일시  2010년 03월 28일
· 말씀  로마서 5장 6~1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 일시  2010년 03월 21일
· 말씀  마가복음 14장 32-4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 일시  2010년 03월 14일
· 말씀  로마서 3장 23~26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십자가의 도
· 일시  2010년 03월 07일
· 말씀  고린도전서 1장 18-2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삶의 방식
· 일시  2010년 02월 28일
· 말씀  요한복음 15장 5-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인생의 멘토가 있습니까?
· 일시  2010년 02월 21일
· 말씀  에베소서 4장 11-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힘써 지켜야 할 것
· 일시  2010년 02월 14일
· 말씀  에베소서 4장 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교회
· 일시  2010년 02월 07일
· 말씀  로마서 14장 17-2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함께 하나님을 기쁘시게
· 일시  2010년 01월 31일
· 말씀  로마서 14장 13-2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멈추십시오
· 일시  2010년 01월 24일
· 말씀  누가복음 10장 38-4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믿음이 없이는
· 일시  2010년 01월 17일
· 말씀  히브리서 11장 5-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을 기쁘시게 II
· 일시  2010년 01월 10일
· 말씀  시편 51편 16~19절 말씀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을 기쁘시게
· 일시  2010년 01월 03일
· 말씀  요한복음 8장 29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마십시오
· 일시  2009년 12월 31일
· 말씀  잠언 4장 20~27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 일시  2009년 12월 27일
· 말씀  역대하 32장 24-33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