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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의 상처  [3330]
· 설교 일자 : 2010년 07월 11일
· 본문 말씀 : 히브리서 12장 1-2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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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의 상처 (히브리서 12장 1-2절)
  여러분들은 부끄러웠던 일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얼굴이 붉어지고 화끈거리며 창피함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까? 살아오면서 부끄러웠던 일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대단히 완벽한 삶을 살아오신 것입니다. 아니면 혹시 부끄러움을 못 느끼는 뻔뻔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남자 같은 경우는 소변을 보고서 바지 자크를 올리지 않은 채 다니다가 뒤늦게 발견한다든지, 여성인 경우, 스타킹이 나갔다고 그러지요, 스타킹에 구멍이 생긴 줄도 모르고 멋을 내고 시내를 활보하다가 뒤늦게 알게 된 경우도 그렇습니다. 어떤 여성은 화장실에 갔다가 나오는데 바지뒤쪽으로 화장지가 길게 꼬리처럼 따라오는 여성도 있었답니다. 볼 일으로 보고 화장실에 늘어뜨려져 있는 화장지 끝이 바지와 함께 올려진 바람에 화장지가 따라 나온 것입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킥킥거리고 수근대는 바람에 뒤늦게 알게 되고서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다시는 그 근처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때 일이 생각이 나서. 여러분, 남의 일이니까 우습지요? 자기가 직접 그 일을 당하고 나면, 그렇게 여유 있게 웃음이 나오지만은 안을 걸요.
  심방을 가다보면 계획에 없던 가정을 갑자기 심방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심방을 받게 된 여교우들 가운데 당황스러워 하면서 “아휴~ 세수도 안 했는데...”라고 하며 몹시 부끄러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골목길에서 만났을 때에도, 나는 세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 잘 모르겠는데,  얼굴을 가리면서 “세수도 안 했는데 어떻게 해~”하면서 세수 안 한 것을 자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실 화장 한 것과 안 한 것은 구분이 잘 되지만, 세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일부러 코앞까지 들여다보기 전에는 잘 모릅니다. 그리고 세수를 했겠거니 ~ 라고 생각하지, 저 사람이 세수를 했나 안 했나 그것만을 확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에 있던 교회에서는, 세수도 안 했는데 연락도 없이 갑자기 심방 오게 했다고 구역 권찰과 크게 싸워서 교회에 안 나오는 교인도 봤습니다. 목사님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고 느껴 몹시 견딜 수 없었나 봅니다. 그 때에 나는 그 여교우가 세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스스로 밝혔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했더라도 그것이 크게 문제가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면, 수치스러운 감정 때문에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창피해 할 텐데도, 전혀 부끄러움을 못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넉살이 좋은 사람도 있고, 뻔뻔한 사람도 있고, 염치없는 사람도 있고, 더 심하면 양심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양심이 하는 역할 중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올바르지 못한 일을 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어 다시는 그런 일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노력하게 합니다.

  오늘은 부끄러움, 수치심에 관한 말씀입니다. 지지난 주에는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거절감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 받을 수 있는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수치심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 받고 해결할 수 있는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두려움, 거절감, 수치심 등 이런 내면의 상처들은 우리들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받아 누리지 못하게 하는 훼방꾼입니다. 신앙성장의 장애물입니다.
  부끄러움의 감정의 시작은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제일 처음 나타난 증상이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원죄 속에 있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의 뿌리입니다.  수치심 그 자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으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감정이 어떻게 처리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수치심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건강한 수치심과 해로운 수치심입니다. 건강한 수치심은 우리가 인간임을 알게 해주는 수치심입니다. 당황스러운 순간에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는 것으로 수치심을 표현합니다. 낯선 사람을 만나 수줍어하면서 부끄러워하는 것을 통해 낯선 사람을 경계하기도 합니다. 이런 수치심은 건강한 수치심입니다. 건강한 수치심은 우리가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것, 제한된 존재라는 것, 어쩔 수 없이 실수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래서 교만한 우리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수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우리가 실수할 수 있으며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수치심은 다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반성하고 노력하고 발전하게 해 주는 수치심입니다. 우리의 삶을 개선해 나가는데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해로운 수치심도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했을 때, 굴욕감을 느꼈을 때, 심하게 거절당함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수치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수치감이 상처로 자리를 잡으면 해로운 수치심이 됩니다. 해로운 수치심은 상실감과 절망감을 가져옵니다. 일단 수치심에 사로잡히면 아무리 명랑하던 사람도 웃음을 잃고 무겁고 메마르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정신적 고통에 사로잡혀 전반적으로 삶의 활력을 잃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며 그 결과 무의미하고 파괴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수치심은 주로 부모를 통해, 사회적 환경을 통해 자녀에게 주어집니다. 부모가 너무나 많이 창피나 굴욕 등을 주어서 자녀를 다스리고 교육할 때 자녀에게 수치심의 상처가 만들어집니다. 부모가 바람을 피운 경우, 그것은 자녀에게 엄청난 수치심을 갖게 하고 그것이 열등감으로 뿌리를 내립니다. 내적 치유 사역을 하는 분들의 연구보고에 의하면, ‘바람을 피우는 아버지를 둔 자녀 중에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 중 한 쪽이 사회적,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인격적 장애가 있거나, 부부싸움을 자주하면 역시 자녀들의 내면에 수치심이 뿌리를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해로운 수치심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이며 부적절하고 흠이 많고 무가치하며 쓸모가 없다”고 느끼게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인간으로써 불합격품이며 못나고 열등한 면이 많은 존재로 여기는 감정입니다. 이 수치심은 죄책감과는 다른 것입니다. 죄책감은 자신이 한 어떤 일에 대해 무언가 잘못이 있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그러나 수치심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언가 잘못이 있고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감정입니다. 즉 내가 한 어떤 일이 잘못 되었다고 느낀다면 이는 죄책감이요 나 자신이 잘못되었다라고 느낀다면 수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경험하는 많은 감정 가운데 해로운 수치심은 무겁고 파괴적인 감정입니다. 수치심은 분노와 두려움과 함께 가장 폭발력이 큰 우리의 삶을 강하게 지배하는 감정입니다. 존 브래드쇼는 그의 책 [수치심의 치유]에서 해로운 수치심을 악마 같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해로운 수치심이 뿌리 깊이 자리를 잡으면 병적인 수치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병적인 수치심은 우리를 파괴하고 끌어내리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즉 내가 한 가지 일을 잘못했다면 나라는 사람 전체가 곧 무가치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결론은 내리게 됩니다. 이러한 병적 수치심은 우리의 삶 전체를 꿰뚫는 만성적 질병으로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온누리 가정상담연구원 원장인 강선영 목사의 글에는 이런 내용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저는 매사에 자신감도 없고 의욕도 안 생겨요. 내가 왜 이렇게 무기력한지 모르겠어요.” “제가 잊지 못하는 아버지의 한마디가 있어요. 병신 같은 자식, 겨우 그것밖에 못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눈물을 글썽거린다) 그 말은 평생 지워지지 않아요. 아버지의 그 한마디는 지금까지 저를 따라다니고 제 발목을 잡고 있어요.” “상담을 받고 치유그룹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제가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고 매사에 무기력한지 몰랐어요. 제 안에 그렇게 수치심이 가득한 줄 몰랐으니까요. 그냥 저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인식하며 살았어요.” 해로운 수치심, 병적인 수치심으로 이렇게 우리 안에 수치심의 상처가 있을 때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의 삶을 파괴하여 절망, 소외, 편집증, 정신분열증, 강박 장애, 자아분열, 뿌리 깊은 열등감, 성격장애를 일으키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상처는 치유해야 합니다. 몸의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내면의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수치심의 상처를 숨긴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숨겨진 수치심의 상처를 치유 받아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다가 부끄러움을 당해 자존심이 상하고 수치심이 들어서 교회에 못 나오겠다고 하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른 교회로 옮깁니다.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교회를 옮긴다고 해서 그 내면에 있는 수치심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수치심을 대면하여 극복하고 해결하지 않는다면, 수치심은 숨겨진 채로 내면 더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숨지 말고 고통스럽지만 부딪쳐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을 하면서 다른 교우의 허물이 드러날 때, 그가 수치심의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그 입장이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수군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함께 품고 허물을 덮어주고 치유의 자리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좋은 교회요, 은혜가 넘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눈이 밝아져 자신들의 벌거벗은 모습이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옷을 해서 입었습니다. 입었다고 하기보다 걸쳤다고 하는 것이 더 낫겠지요. 성경의 내용으로 보면, 최초의 옷은 남자나 여자나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여자가 남자보다 가릴 것이 더 많아져서 인류는 여자가 남자보다 옷값이 더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나뭇잎으로 만든 옷이 일회용 옷은 아니지만 며칠 못가는 옷이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안타까우셨는지,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셨습니다. 부끄러움을 가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그것을 받고 누릴 자격이 없고 값을 치를 수가 없을 때에 긍휼을 베푸시고, 먼저 사랑하시고, 거저 주시고, 받아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은혜는 용서입니다. 이 용서를 통해 우리는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은혜는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수용입니다. 수용을 통해 수치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를 가지고 결코 우리 자신 전체의 모습으로 보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때 언제나 기꺼이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기억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새 출발을 허락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숨겨진 수치심을 하나님 앞에 드러낸다면 수치심은 그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우리 내면의 수치심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치유 받아야 한다. 그러면 어떤 종류의 상처나 수치심도 모두 치유 받을 수 있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온전한 자아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태초에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는 있는 그대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씀은 단순히 옷을 입었다, 안 입었다는 기준에 의해 표현한 말씀이 아니라 훨씬 더 심오한 의미의 말씀입니다. 자신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과 먹은 후의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신체적 변화가 있습니까? 변한 것이라고는 그들의 마음과 영혼이 변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형상 중의 하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들고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무조건적으로 받아주시는데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자격이 나에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나를 대신 죄 값을 치르시고 죽으셔서 내 생명을 구해주셨는데, 내가 내 생명의 가치를 함부로 평가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면서 실수하고 허물이 드러날 때,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만 실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실수합니다. 실수를 조금 더 하느냐 조금 적게 하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인간이 실수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수를 거울삼아 배워나가면 됩니다. 실수가 나를 더욱 훈련하고 성숙시키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하면, 실수했을 때 부끄러워 당황하고 수치심만을 느끼지 않고 수치심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로운 수치심을 건강한 수치심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길은 영적인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벌거벗겨져 나무 위에 못 박혀 모든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셨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예수님께서 벌거벗겨진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힘없이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겠다고 했다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렇게 죽어가야만 했던 것은 더욱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수많은 능력을 행하셨던 주님이 아무런 능력도 행하지 못하고 피흘려 죽어가야만 했던 주님, 수없이 따르던 무리들은 온데 간데 없고, 목숨을 내걸고 따르겠다고 하던 제자들도 다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것이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극악한 죄인이 되어 십자가형에 죽어가는 것이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런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부끄러움을 못 느끼신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참으셨습니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이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친히 수치를 당하시어 모든 인간이 당할 수치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주님이 사랑하시는 인간이 구원을 얻게 될 것과, 수치와 고난을 감당하신 후에 얻게 될 영광을 바라보시면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 10절에는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하면서 11절에,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로마서 13장 14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옷이란 무엇입니까? 옷은 첫째로는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줍니다. 둘째로 옷은 우리의 몸을 보호해 줍니다.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해 주고, 따가운 햇살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주고, 매서운 바람으로부터, 외부의 거칠고 날카로운 물건으로부터 몸이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셋째로 옷은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에 따라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나타내주고,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 일을 알맞게 수행하도록 합니다. 예를 들자면, 군복, 의사 까운, 주방장옷, 등등... 운동복은 운동을 가볍고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입는 옷입니다. 작업복은 작업을 할 때에 편하게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입는 옷입니다. 넷째로 옷은 우리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기 좋게 만듭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옷은 여러 가지 역할을 하면서, 음식과 집과 함께 인간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세 가지 필수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의식주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시는 분으로 믿고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으로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리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분으로 믿고 영접하여 “예수님 안에서”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때문에!”라는 말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참으로 보잘것없지만 예수님 때문에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나는 부끄러운 모습이 있지만 예수님 때문에 그 부끄러움이 다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내 대신 부끄러움을 당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나의 부끄러움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살아갑니다. 나는 부끄러운 모습이 있지만 나는 예수님 안에서 나의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가치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바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까지 내주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 우리가 가치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가치는 예수님께 있는 가치이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가치입니다. 금이나 은이나 없어질 것으로 이루어진 가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보혈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치심이 들 때마다 “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어! 난 충분해”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마가복음을 쓴 마가는,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실 때 따라가서 보려고 하다가 무리들에게 잡히자 도망가려고 하다가 그만 옷자락이 벗겨져서 알몸으로 도망갔습니다. 청년 마가는 얼마나 당황스럽고 부끄러웠겠습니까? 본인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인 부끄러움이었겠습니까? 그 날을 생각하면 아찔했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한 모습도 부끄러웠지만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지 못했다는 비겁한 자신의 모습 또한 부끄러웠습니다. 그 후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자기 집 다락방, 즉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 중에 너무도 힘들었던 나머지 견디다 못해 중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일로 인해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다투게 되었고, 바울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마가는 자신의 삶 속에 겪었던 부끄러움과 경솔했던 모습 등 못난 자신에 대해 비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가를 인내하시면서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도 바울과의 관계도 회복이 되고, 로마 감옥에 있던 바울은 마가를 그렇게 보고 싶어 할 정도로 사랑해 주었습니다. 마가는 수치심의 상처에 갇혀 자신의 삶을 무너뜨리고 우울한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용서하시고 다시 받아주시는 사랑을 받아 부끄러운 자신을 예수님의 사랑의 옷으로 가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과거의 부끄러운 삶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의 상처를 예수님을 통해 치유 받고 회복되었습니다.
  [지선아, 사랑해]와 공영방송에서도 소개된 이지선 자매, 2000년 7월 30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취상태의 갤로퍼 운전자로 인해 교통사고를 당해, 차가 불타면서 스물세 살 나이에 전신화상을 입어 소생 불가능한 상태에서 살아나 수십 번의 수술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자신의 외모에 엄청난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지선 자매는 화상으로 인한 외모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새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눈썹이 없습니다. 손톱도 없습니다. 그런데 눈썹이 없으니까 눈썹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고, 손톱이 없으니까 손톱이 있을 때는 몰랐던 손톱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어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은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온갖 상처투성이로, 만취상태로 운전하여 사고를 낸 그 사람을 평생 원망만하고,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을 한탄하여 수없이 자살을 시도하고, 우울증에 걸리고, 외모에 대한 수치심으로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어야 할 그가 수많은 장애우들과 인생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는 하나님께서 “지선아, 내 사랑하는 딸아, 내 너를 세상 가운데 세우리라. 아프고 병든 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비전을 품고 살아갈 때, 이 세상에서는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회복될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부끄러움을 느낄 때 건강한 수치심이 되어야 합니다. 해로운 수치심의 상처가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들고 나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치유받아 자신감과 담대함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0년 07월 11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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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바리새인의 패션쇼
· 일시  2010년 12월 12일
· 말씀  마태복음 23장 1-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 일시  2010년 12월 05일
· 말씀  마가복음 12장 18-2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고?
· 일시  2010년 11월 28일
· 말씀  이사야 7장 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 일시  2010년 11월 21일
· 말씀  전도서 12장 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쥐엄 열매
· 일시  2010년 11월 14일
· 말씀  누가복음 15장 11-2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왜 감사해야 합니까 ?
· 일시  2010년 11월 07일
· 말씀  시편 100편 1~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손 마른 사람
· 일시  2010년 10월 31일
· 말씀  눅6:6~11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부르심을 받은 대로
· 일시  2010년 10월 24일
· 말씀  고린도전서 7장 20-2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등불이 켜져 있습니까?
· 일시  2010년 10월 17일
· 말씀  디모데전서 1장 18-2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신실한 사람
· 일시  2010년 10월 10일
· 말씀  골로새서 1장 1~2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거룩한 식사
· 일시  2010년 10월 03일
· 말씀  요한복음 6장 47-5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빛의 열매
· 일시  2010년 09월 26일
· 말씀  에베소서 5장 8-1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임마누엘 신앙
· 일시  2010년 09월 19일
· 말씀  마태복음 1장 23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
· 일시  2010년 09월 12일
· 말씀  시편 57편 1~2절
· 설교  손병인 목사 (양정중앙교회)
   
주일예배 설교
 그럼, 그리 바꾸겠습니다
· 일시  2010년 09월 05일
· 말씀  누가복음 14장 25-3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믿음을 사용하십시오
· 일시  2010년 08월 29일
· 말씀  고린도후서 13장 5-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수준을 더 높이십시오
· 일시  2010년 08월 22일
· 말씀  여호수아 6장 1~7절, 15~2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광복 ! 아름다운 그 이름
· 일시  2010년 08월 15일
· 말씀  요한복음 14장 1~6절
· 설교  이동훈 목사
   
주일예배 설교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
· 일시  2010년 08월 08일
· 말씀  로마서 15장 13절 말씀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 일시  2010년 08월 01일
· 말씀  시편 32편 1-1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어찌하여 불안해하는가?
· 일시  2010년 07월 25일
· 말씀  시편 43편 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사울 왕
· 일시  2010년 07월 18일
· 말씀  사무엘상 18장 6-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