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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는 말 푸는 말  [3384]
· 설교 일자 : 2011년 05월 15일
· 본문 말씀 : 베드로전서 3장 8-12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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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는 말 푸는 말 (베드로전서 3장 8-12절)
  어느 한심한 남편의 얘기입니다. “아내가 설거지를 하다가 말했습니다. “여보, 애 좀 봐요.” 그는 아내의 말대로 한 시간 동안이나 애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알게 된 아내가 행주를 던지는 바람에 눈탱이를 얻어맞았습니다. 아내가 청소를 하다가 말했습니다. “여보, 세탁기 좀 돌려주세요.” 그래서 그는 낑낑거리며 세탁기의 방향을 돌렸습니다. 이것을 본 아내가 이번에는 바가지를 던져 뒤통수를 얻어맞았습니다. 아내가 텔레비전을 보며 말했습니다. “여보, 커튼 좀 쳐 주세요.” 그래서 그는 커튼을 툭 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때 화가 난 아내가 리모컨을 던졌는데, 그것을 피하려다 벽에 옆통수를 부딪쳤습니다. 아내가 빨래를 널며 말했습니다. “여보, 방 좀 훔쳐 주세요.” 그래서 그는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여보, 훔치는 것은 나쁜 짓이야.” 그 순간 아내가 빨래바구니를 집어던졌습니다. 그는 그것을 피하려다가 걸레를 밟고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쪘습니다. 밤이 되어 아내가 만화책을 보던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그만 자요.” 그 말에 그는 근엄하게 응수했습니다. “아직 잠도 안 들었는데 그만 자라니?”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내에게 베개로 두 대나 맞고 거실로 쫓겨나서 소파에 기대어 울다가 잠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는 아닙니다. 실제로 이런 남편이 있다면 고통이며 불행입니다. 이 이야기는 가정 안에서 말이 안 통하는 남편의 모습을 극대화한 유우머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남편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아내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가정을 이루며 사는 가족 전체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을 주고받으며 의사소통이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이야기입니다.

  말은 우리 생활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이 말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말이 그 사람의 현실입니다. 사람이 말을 만들어 말을 하지만 결국 그 사람 속에 꿈틀거리는 말이 그 사람을 움직입니다.  
  성경 말씀에는 혀에는 권세가 있고 말에는 힘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잠언 18장 21절 말씀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야고보서 3장에는, 큰 배가 작은 키에 의해 방향이 결정되는 것처럼, 우리 몸의 작은 혀가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말씀합니다. 또 작은 불이 큰 숲을 불태워버릴 수 있는 것처럼, 작은 혀에서 나오는 말이 우리 삶의 수레바퀴를 불살라 버린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혀의 권세가 말로 나올 때 말에 힘이 있습니다. 말로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병들게도 하고, 말로 치유하기도 합니다.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말로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말로 사람을 망하게도 하고 흥하게도 합니다. 말로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고, 행복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말에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말하는 습관, 언어 습관이 여러분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은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혀를 금하라고 말씀합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혀를 금하라는 말씀입니다. 혀를 제어하라는 뜻입니다. 악한 말을 그치고,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나쁜 말을 하면 나쁜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혀를 제어한다는 것은 침묵하고만 있거나 조심조심 말을 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혀를 원하는 데로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혀를 제어하여 나쁜 말을 금하고 선한 말, 덕을 세우는 말, 사랑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좋은 날, 행복한 날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혀를 제어하여야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모든 가족이 좋은 언어습관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특별히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좋은 언어 습관을 가르치고 물려주어야 합니다.
  가정 안에서 가족의 언어습관은 전염성이 있습니다. 밖에서 유행하는 눈병을 옮아오면 수건을 같이 쓰거나 손잡이를 같이 만질 수밖에 없는 가족이 눈병이 전염되어 옮습니다. 그러니까 전염병이지요. 그런데 눈병과 같이 전염병만 가족에게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습관도 전염됩니다.
  좋은 언어생활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잘못된 언어가 가족 안에 퍼집니다. 짜증내는 말, 불평하는 말, 원망하는 말, 화내는 말, 악담하는 말, 비방하는 말, 더러운 말들이 전염병처럼 퍼집니다. 물론 전염병이라도 건강한 사람, 면역체계가 튼튼한 사람은 전염되지 않는 것처럼, 좋지 않은 말들도 모든 가족에게 다 전염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전염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노약자에게 전염병이 쉽게 전염되듯이, 어린 자녀들, 마음이 약한 사람, 좋은 습관이 형성되어 있지 않는 사람, 부정적이고 거친 사람은 쉽게 전염되고 오히려 더 확산됩니다. 쉽게 집에서 부모가 욕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 아이는 금방 배웁니다. 아이들은 밖에 나갔다가 욕하는 애들하고 놀다가 오면 금방 욕을 배워가지고 옵니다. 그것을 바로 고쳐주지 않으면 그 아이는 다른 좋은 말보다 더 확실하게 욕을 잘하는 아이가 됩니다. 좋은 것은 어렵게 배워 쉽게 잃어버리지만, 악은 쉽게 배워 힘들여 노력해야 버려집니다. 악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혀를 제어하라는 뜻은 적당한 때 적당한 말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정안에서 대화하는 것이 좋다고 이말 저말 쓸데없이 쉴 새 없이 말을 들어 놓는 것은 잔소리가 됩니다. 특히 여성들이 잘하는 잔소리를 줄여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집에서 잔소리를 할까요? 안 할까요? 한답니다. 나는 잔소리를 안 한다고 생각하고 꼭 해야 할 말이니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애들들은 잔소리로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잔소리란 듣는 사람이 잔소리로 느끼면 잔소리가 됩니다. 잔소리는 귀에는 들리지만 마음에는 전달이 되지 않는 소리가 잔소리입니다. 그러니까 효과가 없는 말, 마음이 전달되지 않는 말, 쓸데없는 말이라고 여겨지는 말이 잔소리입니다. 적당한 말을 해야 말이 전달됩니다.
  요즘 학생들은 휴대전화를 거의 다 사용합니다. 유치원생 중에도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휴대전화에는 상대 전화번호와 그 전화번호의 이름을 입력해 놓으면, 그 사람에게 전화가 오면 전화번호와 그 사람의 이름이 같이 화면에 나타납니다. 어느 여학생의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핸드폰의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미친 개소리”였습니다. 도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자기 엄마랍니다. 그 여학생이 자기 엄마의 전화를 일부러 안 받으니까 벨소리가 계속 들렸습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는 친구가 휴대폰 화면을 보면서 “그 미친 개소리 그만 꺼!” 그러더랍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랍니다. 그 여학생은 어머니의 전화를 왜 미친 개소리로 이름 지었을까요? 그의 어머니는 잔소리 수준을 넘어서 나쁜 말, 상처 주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함부로 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여러분의 자녀의 휴대폰에 여러분의 전화번호를 무엇이라고 이름 붙여 놓았는지 한 번 살펴보십시오. 아빠, 엄마라고 해 놓지 않고, 미친 개소리, 왕짜증, 아저씨, 아줌마, 또는 이상한 이름을 붙여 놓지 않았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가정사역단체의 조사에 의하면, ‘나에게 상처를 주며 고통을 준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40.7%가 아버지, 32.1%가 어머니, 27.2%가 집안 식구라고 응답했습니다. 1,2,3위가 다 가족이었습니다. 가족이 사랑을 주고, 위로를 주고,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어야 하는데, 그와 반대로 상처를 주고 고통을 가장 많이 주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통계입니다.
  가정 안에서 상처와 고통을 주는 주범은 말입니다. 입에서부터 나오는 말이 상처와 고통의 주범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는 말이 상처를 주고, 치명적인 고통을 주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말에는 묶는 힘과 푸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은 말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말로 생활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삶이 담아져 있습니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인격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사람의 삶속에서 겪었던 이야기, 사연이 담겨져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이 사연을 풀어내고 살아가야 하는 데 사연에 묶여 있으면 말도 묶이는 말을 합니다. 가정은 말로 풀리기도 하고 묶이기도 합니다.
  노씨는 사랑하는 남자와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정말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행복한 여자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멋있는 남편에, 훌륭한 집안에 자기를 사랑해주는 시부모님에, 상냥한 시동생에 정말 부족한 것이 없는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핑크빛 신혼 생활도 며칠뿐, 그렇게 온순해 보였던 시어머니가 본색을 드러내셨고, 그렇게 상냥하기만 했던 시동생이 매사 까다롭게 굴었습니다. 그렇게 점잖게 보였던 시아버님은 말 그대로 이빨 빠진 사자였고, 남편은 약하디 약한 종이 호랑이였습니다.
  남편의 집안 식구들은 진밥을 참 좋아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물론 시아버지, 시동생, 그리고 남편까지 된밥은 조금도 소화를 못 시키는 사람들입니다. 노씨는 억울한 일이 있을 때마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속아서 시집 왔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남편이 자기편에 서 주지 않을 때 마다 영락없이 된밥을 지어 상에 올렸습니다. “얘, 넌 내가 된밥 싫어하는 것 아직도 모르냐? 밥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몇 번을 일러야 하냐? 네 집 식구들은 다 된밥을 먹냐? 지독한 사람들이라 밥도 센 것을 먹는가보구나. 아휴, 속상해! 가서 따스한 물이라도 가져와라. 물에 말아먹어야지, 어디 밥이 돌 같아서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냐?” 시어머니의 반응에 한층 더 화가 난 며느리는 물을 가져오며 속으로 되뇝니다. ‘뭐, 지독한 사람들이라 밥도 센 것을 먹는다고? 참, 기가 막혀서... 어쩜 말을 해도 저렇게 싸가지 없는 말을 골라서 하는지 몰라. 그래, 우리집은 지독해서 밥도 센 것을 먹는다. 그런데 아냐? 된 사람들이라야 된밥도 먹을 수 있는 거야. 너네는 되먹지 못해서 된밥을 못 먹는 거라고. 제대로 된 사람이 있어야 된밥을 먹지? 지지리도 못난 사람들이라 진밥을 먹는 거야. 질척거리는 사람들만 진밥을 먹는다고. 알기가 아는지 몰라. 웃기고 자빠졌어, 정말!’
시어머니나 며느리나 벌어진 상황을 묶었습니다. 상황을 풀어야 하는데 오히려 상황을 더욱 나쁘게 묶었습니다. 말로 풀면 풀리는 데, 말로 묶으니까 더욱 묶였습니다. 푸는 말을 하지 않으면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됩니다.
  많은 경우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묶는 말을 합니다. 자신을 그 사건과 상황에 얽매여서 그 사건과 상황에 좋지 않은 영향을 받도록, 지배를 받도록 점점 더 강한 말로 묶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과 상황에서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잘 살펴보십시오. 아니면 여러분의 배우자나 또는 친한 친구, 동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자신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화를 잘 내고, 또는 거칠게 말을 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물어보십시오. 분명히 그 상황과 관련된 과거에 경험한 어떤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연이라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묶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연들이 여러분의 생각을 지배하거나, 여러분의 삶의 태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거나, 여러분의 삶에 한계를 정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사연은 풀리지 않은 감정으로 남아서 여러분을 묶습니다. 풀리지 않은 감정은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감정이 묶이면 말도 거기에 묶이고, 말이 묶이면 묶인 말밖에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묶인 사연은 열등의식으로 뿌리내리고, 피해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과잉 반응을 하며 허세 심리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복 심리로 치닫습니다.

  성장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사건을 통해 교훈을 얻고, 그 사건은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건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성장케 하는 과정이 됩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다윗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골리앗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와 이스라엘 군대가 맞서 싸우려고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입니다. 다윗의 형들은 전쟁에 소집되어 나갔습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막내아들 다윗에게 형들에게 음식 좀 갔다가 주고, 형들 소식 좀 알아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다윗이 전장에 와 보니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블레셋 장수가 싸움을 돋우려고 앞서 나와서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합니다. 이스라엘을 모욕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인들은 어느 누구도 대꾸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하여 도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할 수 있느냐며 의분을 하여 군인들에게 묻습니다. 그런 그를 본 큰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화를 내면서 말하였습니다. “니가 여기 왜 왔냐? 들에 양들은 어떻게 하구 땡땡이 친 거야? 이 교만하고 완악한 놈, 너 전쟁 구경하러 왔지?” 이 말이면 다윗이 충분히 형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다윗의 얼굴이 빨개지고, 속에서 심장이 뛰면서 형에게 화를 낼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어떻게 형이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내가 언제 양 치는 거 게을리 한 적 있어? 내가 양 버려두고 전쟁 구경이나 오는 한심한 놈인 줄 알아? 그리고 형이 큰 형다우려면 무조건 그렇게 말하지 말고 좀 알고나 말해야지. 아버지가 심부름 시켜서 온 거란 말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준 큰형 엘리압의 말에 깊은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형의 말에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겠습니까?" 그렇게만 대답했습니다. 다윗은 형의 말에 상처를 입을 수 있었고, 그 상처와 형의 말과 마음 때문에 자신이 묶여 있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흘려보냈습니다. 풀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에게는 형의 말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해야 할 목표가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건마다 상처받고, 맺히고, 묶여 버리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더 성숙한 사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사연은 풀어져야 합니다. 상처 받은 사연, 어두운 과거의 사연, 여러분의 가슴에 맺힌 사연은 풀어져야 합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애매하게 욕을 먹고, 원치 않는 상처를 받았던 안씨는 선생 공포증이 있었습니다. 친구들도 그를 놀렸습니다. 잘 놀아주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사건이 생기면 괜히 안씨가 했다고 친구들이 엉뚱한 고자질로 자기를 이상한 아이로 만들었고, 앞뒤 사정을 묻지도 않고 친구들의 말만 믿고 안씨를 혼냈던 선생님들 때문에 안씨는 많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라면 싫고, 못 믿겠고, 옆에 가면 벌벌 떨렸습니다. 한 번은 경기도 강화에 있는 작은 집에 놀러갔는데 그 옆집 아이가 자기 아버지와 공놀이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안씨가 너무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보고 있으니, 그 아이의 아버지가 같이 와서 놀자며 안씨를 불렀습니다. 엉겁결에 함께 공놀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뛰고 뒹굴고 껴안고 소리치고 웃고 영겨 붙고 도망가며 너무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그러다가 안씨의 실수로 그 아이가 넘어지게 되었고, 그 아이는 다쳐서 다리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동네가 떠나가라 우는 아이 옆에서 안씨는 어쩔 줄 몰랐고, 그 아이의 아버지는 달려와 응급조치를 하며, 아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곤 안씨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넌, 안 다쳤니? 우리 영수가 너무 크게 울어서 네가 더 놀랐겠구나. 별 일 아니니 놀라지 말고, 우리 내일 또 놀자꾸나.” 안씨는 그 아저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아저씨가 참 좋은 분이라는 것은 가슴에 남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친절할 수 있을까? 아들이 나 때문에 넘어져 피까지 났는데, 날 야단치지도 않았어. 다른 사람들 같으면 난리를 쳤을 텐데... 참 좋은 아저씨야.’ 안씨는 그 아이가 너무 부러웠습니다. 집에 돌아와 작은 아버지께 일어난 일을 말하며, 옆집 아저씨가 참 좋은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작은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 “아, 그 분! 여기 초등학교 선생님이셔. 참 좋은 분이시지. 이 동네 애들한테 인기 짱이야!” 안씨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좋은 아저씨, 좋은 아버지, 좋은 선생님. 지금까지 서로 연결되지 않았던 단어들입니다. 선생님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억울하고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아무런 느낌 없이 그 선생님과 같이 놀고 뒹굴 수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희한하고 좋은 수 없었습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이런 경험 속에서 안 씨의 묶인 사연은 풀리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들과의 묶인 사건 사연들이, 그 동안 받은 상처가 다른 선생님의 친절하고 따뜻한 말과 함께 한 경험으로 풀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각기 삶속에서 사연이 생깁니다.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연을 풀어야 합니다. 가정은 묶인 것을 푸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연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자꾸만 꼬이고 얽매이게 만들지 말고 풀어야 합니다. 말은 묶는 힘도 있고 푸는 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어, 말이라는 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 선물로 상대방을 아프게도 할 수 있고,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죽이는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 안에 사연을 풀고 내 안의 상처를 치유 받아야 합니다. 내가 상처받은 것이 그냥 남아있다면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것입니다. 내안에 묶여있는 그 어떤 사연이 있다면, 그 사연을 풀지 않는 이상, 가정 안에서 대물림이 이루어집니다. 간단한 예로, 시어머니가 자기 시어머니에게 당했던 것, 상처, 그 사연들을 풀지 않은 채 며느리를 보게 되면 똑같이 시어머니가 한 대로 대물림을 합니다.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은 아들이 그것을 풀지 않고 치유되지 않은 채 결혼하면 자기 아들에게 또 상처를 주고 상처의 대물림이 이루어집니다.
  가정 안에서 상처가 치유되고, 묶인 것들이 풀려져야 합니다. 가정생활이라는 것이 밥 같이 먹고 잠 같이 자고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만이 가정생활이 아닙니다. 서로 치유하고 회복되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돕고 함께 노력하는 것이 가정생활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생명의 언어가 들어와야 합니다. 생명의 언어란 복음의 언어입니다. 복음의 언어란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고, 스스로 자신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갈라디아 2장 20절 말씀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얼마 전 문경에서 일어난 십자가 죽음 사건처럼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처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라고 한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할 것은 우리의 옛 자아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자아, 죄악으로 물들어있던 나, 욕심으로 가득 찼던 나를 죽이고, 나의 어두운 과거를 죽이는 것이고, 나를 묶고 있는 사연을 못 박는 것입니다. 내 몸에 못을 박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예수님께서 주신 새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과거의 묶인 말, 묶인 사연으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이야기, 복음의 이야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풀어주고, 우리가 푸는 말을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사랑과 은혜로 살아가게 합니다. 나를 넘어서서 예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오늘 본문 8,9절 말씀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8,9절에 무슨 말씀을 합니까?  다른 사람을 동정하며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말씀합니다. 복을 빌어주는 사람으로 살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축복하는 말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축복하는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받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사용하는 말은 그 사람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좋은 도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더러운 말, 누추한 말, 희롱하는 말, 비방하는 말,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 상처 주는 말, 해가 되는 말, 악한 말, 거짓말, 죽이는 말,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산다면 여러분은 더러운 사람, 누추한 사람, 악한 사람, 부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선한 말, 덕을 세우는 말, 위로하는 말, 격려하고 칭찬하는 말, 긍정적인 말, 진실의 말, 감사하는 말, 세워주는 말, 치유하는 말, 살리는 말은 묶는 말이 아니라 푸는 말입니다. 문제를 풀어주고, 맺힌 것을 풀어주고, 상처를 풀어주고, 막힌 것을 풀어주고, 묶인 것을 풀어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풀어주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상처를 치유하는 말, 묶인 것을 푸는 말을 하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011년 05월 15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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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불평 중독
· 일시  2011년 07월 24일
· 말씀  시편 37편 1~1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장롱 면허증
· 일시  2011년 07월 17일
· 말씀  야고보서 1장 2~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친구 예수님
· 일시  2011년 07월 10일
· 말씀  누가복음 7장 31~3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에클레시아
· 일시  2011년 07월 03일
· 말씀  마태복음 16장 13-2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주 없이 살 수 없네
· 일시  2011년 06월 26일
· 말씀  마가복음 5장 25~34절
· 설교  김대민 목사
   
주일예배 설교
 삼위일체의 신비
· 일시  2011년 06월 19일
· 말씀  요한복음 16장 12절~1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보혜사 성령
· 일시  2011년 06월 12일
· 말씀  요한복음 14장 25-2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순례자가 받은 세 가지 선물
· 일시  2011년 06월 05일
·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일어나 걸어가라
· 일시  2011년 05월 29일
· 말씀  요한복음 5장 1~9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언약적 공동체
· 일시  2011년 05월 22일
· 말씀  마태복음 19장 3~12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묶는 말 푸는 말
· 일시  2011년 05월 15일
· 말씀  베드로전서 3장 8-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가정이 살아야 합니다
· 일시  2011년 05월 08일
· 말씀  골로새서 3장 18-2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무엇을 물려주시겠습니까?
· 일시  2011년 05월 01일
· 말씀  사무엘상 2장 27-3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그 다음은 누구입니까?
· 일시  2011년 04월 24일
· 말씀  고린도전서 15장 20-2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바로 나 때문입니다
· 일시  2011년 04월 22일
· 말씀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험한 십자가
· 일시  2011년 04월 17일
· 말씀  에베소서 2장 12-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약입니까? 의사입니까?
· 일시  2011년 04월 10일
· 말씀  마태복음 9장 9-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생명의 성령의 법
· 일시  2011년 04월 03일
· 말씀  로마서 8장 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난 받는 사람
· 일시  2011년 03월 27일
· 말씀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통의 쓰나미
· 일시  2011년 03월 20일
· 말씀  디모데후서 3장 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
· 일시  2011년 03월 13일
· 말씀  이사야 58장 6-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묵은 땅을 갈아엎으십시오
· 일시  2011년 03월 06일
· 말씀  호세아 10장 12-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
· 일시  2011년 02월 27일
· 말씀  에스더 4장 12-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세 가지 적
· 일시  2011년 02월 20일
· 말씀  마태복음 16장 21-28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