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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십자가  [2745]
· 설교 일자 : 2011년 04월 17일
· 본문 말씀 : 에베소서 2장 12-18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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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십자가 (에베소서 2장 12-18절)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며 찬송하고 환호하던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요일로 말하면 지금의 일요일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에,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에는 마지막까지 말씀을 가르치셨고,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목요일 저녁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성만찬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별설교를 하셨습니다. 늦은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신 후, 가롯 유다가 앞장 선 로마군인과 대제사장이 보낸 하속들에게 체포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이른 새벽부터 대제사장과 빌라도, 헤롯, 다시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시고, 오전에 채찍을 맞으시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 갈보리 산 골고다 언덕위에 세워진 예수님의 십자가는 로마가 극악무도한 죄수들을 처형할 때 사용하던 형틀입니다. 얼마나 처참하고 잔인무도한 처형 방법이었던지 로마 제국도 나중에 주후 315년에 비인간적인 처형방법이라고 폐지했습니다. 그 십자가에 달려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양손과 발에 큰 못이 박히고, 옆구리에 창이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딱딱하고 거친 나무 기둥입니다. 무게가 60kg이나 되는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 예수님의 피가 얼룩졌습니다.
  십자가형은 수치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수치를 안겨주려고 고안한 사형 방법입니다. 십자가는 창피를 주고 두려움을 갖게 하려고 만든 형벌입니다. 사람들을 협박해서 복종시킬 의도로 만든 형벌이었습니다. 로마가 노예들을 다루기 위해서, 로마에 대한 반역자들과 모반자들에 대한 형벌로 십자가형을 만들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처참하게 처형당할 만한 죄가 있으니 십자가에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형벌 받은 자는 곧 수치스럽고 저주 받은 자로 여겼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눈엣 가시를 빼내어 버리는 일이니만큼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이 속 시원하고 후련했을 것입니다. 유대지도자들의 계략에 휘둘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아우성을 치던 유대 무리들에게는 로마에 억눌리고 삶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것을 예수를 처형하는 일로 스트레스를 해소했을지도 모릅니다. 기대했던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어서 실망감이 분노로 표출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봐도 십자가는 험한 십자가입니다. 인간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그 어떤 것으로도 십자가를 사랑할 만한 구석이 없습니다.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도 부담스럽고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감상적으로 동정하거나 슬퍼하는 것에 그친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며 억울하게 죽으셨기 때문에 불쌍하여 눈물을 흘린다면 예수님을 동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고난 받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고난 받아야 할 만큼 죄를 많이 지었던 것입니까? 왜 험한 십자가, 수치스럽고 저주받은 십자가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셔야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는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분명히 알고 믿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주신 것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어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유월절의 어린양이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기 전에, 애굽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줄듯 하다가 안 놓아주고, 놓아줄듯 하다가 안 놓아주니까 결국 피의 재앙부터 시작하여 10번째 재앙을 맞게 되었습니다. 장자 죽음의 재앙입니다. 그때 장자 죽음의 재앙이 임하지 않게 하려면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다가 기둥에다가 발라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3절,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 약속의 말씀대로 죽음의 재앙이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그냥 넘어갔습니다. 유월되었습니다. 그들이 어느 가문이냐, 어떤 혈통이냐, 부자냐 가난하냐, 귀족이냐 천민이냐, 많이 배웠느냐 못 배웠느냐, 지혜로우냐 미련하냐, 외모가 어떠하냐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집은 살 수 있었고, 어린양의 피가 발라지지 않은 집은 죽음의 재앙이 임하여 그 집의 장자와 가축들의 첫 태생이 죽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유월절이었습니다. 그 때 희생되었던 어린양이 유월절의 어린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지, 거역하는지를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행한 사람과 가족은 죽음의 재앙이 넘어가 살 수 있었고, 그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 애굽 사람들의 집에는 죽음의 재앙이 덮쳤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해야 살든지 죽든지 합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이 학교에 다녀와 숙제를 하는 데 5대양 6대주를 적어오라는 숙제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책을 보아도 찾을 수가 없어서 아이가 아빠에게 숙제를 가지고 와서 물어보았습니다. “아빠! 5대양 6대주가 뭐야?” 한참 생각하던 아빠가 답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건 쉽지. 딸아, 받아 적어라. 5대양은 김양, 이양, 박양, 최양, 강양이란다. 그리고 6대주는 소주, 맥주, 양주, 백세주, 포도주, 그리고... 나머지 6번째 주는 ... ” 한 가지가 생각이 안 나서 한참 끙끙대던 아빠는 소리를 쳤습니다 “아! 생각났다. 여섯 번째 주는 막걸리, 막걸리란다.” 숙제를 해 간 딸은 다음날 학교에서 선생님께 야단맞고 집에 돌아와서 아빠에게 화가 나서 말합니다. “아빠! 숙제를 잘못했다고 선생님께 야단맞았어. 가르쳐주려면 제대로 가르쳐 줘야지.” 그러자 아빠가 대답하는 말, “내 그럴 줄 알았어. 사실은 막걸리가 아니고 탁주라고 해야 맞는데 아빠가 그게 생각이 나질 않아 막걸리라고 잘못 가르쳐 주었지 뭐니.” 같다가 붙인다고 해서 다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정확한 답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수학 문제를 풀어 답을 써야 할 때, 선생님께 내가 교실 청소를 열심히 했으니 수학 문제 답을 맞게 해달란다고 해서 답이 맞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죄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는 아무 방법으로나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답대로 해야 합니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의 질서와 원리와 이치를 정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해결될 수 있습니다. 열쇠를 쥐고 계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사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지키지 못하여 죄를 범했을 때에 죄를 씻어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제사법을 정해주셨습니다. 죄를 지으면 양을 잡고, 소를 잡아 피흘리게 하여 사람의 죄를 대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짐승의 피는 사람의 모든 죄를 완전히 깨끗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서 10장 4절에,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온 인류가 불치병으로 앓고 있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며 대신 죽어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단 한 번에 온전한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처벌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이 치러졌고, 우리의 죄사함이 이루어졌고,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십자가는 죄에 대한 자유와 해방과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죽으실 것을 수천 년 전부터 예언되었습니다. 또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님도 이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얼마쯤 지나면서 수시로 자신이 고난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당하셔야 할 일이고, 겪으셔야 할 일이고, 이루셔야 할 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죄는 우리의 생명을 뺏어가고 대신 우리에게 고통과 절망과 죽음을 주었습니다. 이 생명을 살리려면 생명과 같은 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 말씀처럼,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나의 피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피라고 유언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없애주는 피입니다. 이 피 외에는 우리가 지은 죄를 없애주지 못합니다. 이 방법 외에는 우리 죄를 없앨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 19절에 말씀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피는 보배로운 피입니다. 그래서 보혈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는데,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로 말미암아 막혔던 담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허물어 주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여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성경 말씀 곳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가 구속되었다고, 의로워지고, 화목하게 되고, 정결해지고, 성화되고, 영화롭게 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의 방법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을 이루신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가 인류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인들은 기독교가 너무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교만하다고 비방을 합니다.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교만하다는 말의 뜻은 자신들의 종교를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종교로는 인정하지만 구원의 길은 그것에 없다고 하니까 화를 내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비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주이시고, 구원의 길이라는 진리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좋습니까?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많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 아닌 다른 길, 다른 방법이 있으니까요. 인간적인 정으로는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고, 추구하는 바가 비슷하니 함께 좋게 좋게 지내면 좋겠습니다만은, 만약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십자가의 도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됩니다.
  단,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진리를 믿기 때문에, 무례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에 대해 안타깝고 불쌍히 여기는 것은 좋지만, 다른 종교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십자가의 진리, 복음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알 수 있도록 인격적인 접근이 필요하고,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절에 들어가서 전도지를 나누어 준다든지, 원색적인 비방은 반발과 기독교의 복음을 오해하게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험한 십자가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새겨야 합니다. 온 인류를 위한 십자가의 희생, 십자가에서 행하신 죄 용서,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시고, 행하신 크고 놀라운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승리, 죄와 죽음의 권세와 모든 대적자들을 이기신 승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음의 토대입니다. 중심입니다.
십자가는 하나의 사건이지만, 그 희생은 영원한 효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가 씻어졌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저주를 끊어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그 십자가가 용서의 십자가이고, 사랑의 십자가이고, 희생의 십자가이고,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승리를 이루는 능력의 십자가입니다.
(동영상을 보시겠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적인 배터리와 같습니다. 십자가는 능력의 에너지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힘을 주고, 위로를 주고, 능력을 주어 승리하게 하시는 영적 배터리, 영적 에너지, 영적 파워, 영적 능력입니다. 저는 매일 수염을 깎아야 합니다. 전기로 충전하여 깎는데 며칠 사용하고 나면 충전된 배터리에서 에너지가 다 사용되어 전기면도기 움직이는 소리가 길길길 합니다. 수염도 제대로 깎여지지 않고, 힘없이 면도날이 움직이니까 수염을 이기지 못해 수염이 뽑히듯 아픕니다. 즉시 전기 코드를 연결하여 면도기를 사용하면 전기면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힘 있게 윙하면서 돌아갑니다. 배터리에 에너지가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이 힘이 없고, 무력하지 않습니까? 십자가 신앙이 바로 세우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중심이 되지 않은 생각, 십자가가 중심이 되지 않은 사랑, 십자가가 중심이 되지 않은 봉사, 십자가가 중심이 되지 않은 종교행위는 무력합니다. 힘이 없습니다.

  내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고 믿는 사람은 십자가의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우리 자신은 십자가에서 죽었고, 예수님이 내 안에 주인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을 따라 살 수도 없고, 세상의 유행이나 풍습을 따라 살 수도 없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면 능력이 생깁니다. 나의 옛 자아가 죽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능력입니다. 나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내가 죽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자에게만 나타납니다. 그리하여 주인이신 예수님께 순종하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나의 옛 자아는 죽고 내 안에 계신 주님만이 나타납니다. 그 주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능력의 주님은 우리에게 대적들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육신, 세상, 사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는 육신에 대한 승리의 구심점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십자가의 정신, 십자가의 희생,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를 때 세상의 유혹과 세상의 원리를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승리의 구심점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기만 하면 자신이 승리를 얻을 것이라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모든 게임이 끝났다고 착각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우리 대신 죄값을 치르시고, 우리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대신 죽으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렸습니다. 갈보리 산에서 사탄과 그의 모든 권세는 처참히 패배했습니다. 십자가는 사탄에 대한 승리의 구심점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이 십자가 중심으로 바르게 세워지시기를 바랍니다.
  제씨 펜 루이스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올바른 관점과 균형을 잃어버리고 ‘막다른 골목에서’ 헤매는 이유는 바로 이 십자가의 ‘구심점’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잃어버리면 복음에서 멀어집니다. 십자가 신앙이 가슴에 새겨져 있지 않으면 신앙의 에너지가 생기지 않습니다. 메마른 심령, 시들은 심령, 무력한 신앙이 됩니다. 복음에서 벗어난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한국 전쟁이 낳은 일화 중에 [노래하는 헌병]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미해병 제5연대 F중대의 셜츠 하사입니다. 그는 수시로 찬송을 불렀는데, 노래를 썩 잘 부르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의 찬송을 듣는 군인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밤 개인 참호에서 보초를 서다가 북한 유격대의 습격을 받아 총을 맞았습니다. 조용하던 밤이 갑자기 사나운 총소리로 깨졌습니다. 그 한가운데에 조용한 찬송이 울려나오고 있었습니다. 셜츠 하사가 죽어가며 찬송을 불렀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침입했던 적군이 이 노래가 끝나기 전에 모두 도망쳤고 오히려 습격 받은 해병들은 용기백배하였습니다. 5연대의 군목이 셜츠 하사를 회상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찬송은 정말 신비한 힘이 있었다. 목청은 과히 좋지 않았으나 정성을 다해 간절히 부르는 그의 찬송을 들으면 무한한 용기와 위로를 받았었다' 바로 그 찬송은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으로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 ” 험한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험한 십자가를 묵상하며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용서와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험한 십자가는, 멸망하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이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이고, 잔혹한 십자가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하며,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죄에 대한 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지금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시는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며, 모든 영혼의 대적을 능가하는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을 예수님의 피로 적시십시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에 젖어든 심령은 어느 누구도 흔들지 못합니다. 지옥의 권세도 어쩔 수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 험한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 주간 한 주간 동안, 주님의 험한 십자가를 더욱 굳게 붙잡고, 십자가의 능력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1년 04월 17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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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묶는 말 푸는 말
· 일시  2011년 05월 15일
· 말씀  베드로전서 3장 8-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가정이 살아야 합니다
· 일시  2011년 05월 08일
· 말씀  골로새서 3장 18-2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무엇을 물려주시겠습니까?
· 일시  2011년 05월 01일
· 말씀  사무엘상 2장 27-3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그 다음은 누구입니까?
· 일시  2011년 04월 24일
· 말씀  고린도전서 15장 20-2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바로 나 때문입니다
· 일시  2011년 04월 22일
· 말씀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험한 십자가
· 일시  2011년 04월 17일
· 말씀  에베소서 2장 12-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약입니까? 의사입니까?
· 일시  2011년 04월 10일
· 말씀  마태복음 9장 9-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생명의 성령의 법
· 일시  2011년 04월 03일
· 말씀  로마서 8장 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난 받는 사람
· 일시  2011년 03월 27일
· 말씀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통의 쓰나미
· 일시  2011년 03월 20일
· 말씀  디모데후서 3장 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
· 일시  2011년 03월 13일
· 말씀  이사야 58장 6-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묵은 땅을 갈아엎으십시오
· 일시  2011년 03월 06일
· 말씀  호세아 10장 12-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
· 일시  2011년 02월 27일
· 말씀  에스더 4장 12-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세 가지 적
· 일시  2011년 02월 20일
· 말씀  마태복음 16장 21-28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