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영상

sermon

양정교회 홈페이지와 YouTube 채널을 통하여 설교말씀과 강의를 영상/음성/스트리밍으로 제공해 드리고 있습니다. 2004년 8월 부터, 현재까지의 영상과 말씀 음원파일을 홈페이지를 통해 열람이 가능하며,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설교말씀 다시보기를 통해, 예배시간에 받았던 은사와 감동을 다시한번 회고하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등록된 설교영상 : 1,956
생명의 성령의 법  [2873]
· 설교 일자 : 2011년 04월 03일
· 본문 말씀 : 로마서 8장 1-8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신문수 목사님의 다른 말씀 보기

생명의 성령의 법 (로마서 8장 1-8절)
   아프리카의 말라위라는 나라가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 방귀를 뀌면 처벌하는 법안 신설을 검토하고 있어서 화제입니다. 말라위 정부가 이런 법안을 추진하는 이유는 방귀가 공기를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국민들이 이 법안을 지킴으로써 좀 더 교양있게 행동하고 예절을 지키는 국민의식이 성장하길 바라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말라위 정부의 뜻과는 달리 국민들은 반발이 거셉니다. 대다수 말라위 국민들은 “누가 방귀를 뀌었는지 현장에서 일일이 어떻게 조사할 것이냐?”며 “방귀를 참다가 병이라도 걸리면 어쩔 것이냐?”는 등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서 그런 법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타날까요? 우리나라 국민들 같으면 사방팔방 교차로마다 현수막 붙이고, 띠 두르고 데모한다고 난리일 것입니다. 현수막에 써 붙일 구호를 상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이 땅에는 참으로 많은 법과 규칙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종 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법도 있습니다. 어떤 법은 몇몇 사람에게는 좋은 법이지만 많은 사람에게는 악법인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법을 만들어 놓았어도 사람이 그 법의 정신과 원리를 오해하거나 악용하여 요리조리 법을 피해 자기의 욕심을 채우고, 자신의 범법 행위를 합법적으로 빠져나가는데 사용하면 그 법은 악법처럼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십계명과 제사법을 주셨고, 그것을 중심으로 지켜야 할 율례, 규례, 법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통해 모든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신명기 30장 15-1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 생명과 복을 주시기 위해서 사람들이 지켜야 할 율법을 주셨습니다.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규례와 법도를 사람들이 법 정신과 원리를 생각지 않고 그 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율법이 짐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올무가 되었습니다. 율법이 사람을 정죄하고, 죄와 사망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본래 율법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람 안에 있는 죽음, 즉 사람의 죄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통해 생명을 공급 받지 못하고 죄의 본성만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사람들에게 주신 완전한 율법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실 것이면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법으로 완성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랑의 법으로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목적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절 이하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고발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소?”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사람들이 이 말을 듣자 가장 나이 많은 사람부터 시작하여 하나 둘씩 자리를 떴습니다. 그 여자만 홀로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정죄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네 갈 길을 가라. 이제부터는 죄를 짓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죽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살리고 죄짓지 않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정죄란 죄가 있다고, 죄인이라고 정하는 것입니다. 정죄를 받는다는 것은 다시 기회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겨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는 그 아들을 받아주었습니다. 이것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아버지가 아들을 몽둥이찜질을 해서 내 쫓으면서 “다시는 내 집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어디 재산을 다 날리고 무슨 낯짝이 있어서 왔느냐? 너는 이미 내 자식이 아니다, 호적에서 네 이름을 파냈다!” 이렇게 하면 이것이 정죄입니다. 본래 우리가 이렇게 정죄를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정죄 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가 받을 죄에 대한 징벌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온 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고소당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마음껏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 기회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회개하고 용서받아 다시 의롭게 살 기회를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복 받는 길을 가로막던 죄와 죽음의 법에서 우리가 해방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이 스스로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행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게 하셔서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마음에 영접하면 그 순간부터 우리 마음에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님이 세찬 바람처럼 불어와서 하늘의 구름을 모조리 걷어 주었습니다. 죄와 죽음이라는 잔혹한 폭군 밑에서 평생을 허덕거려야 했을 여러분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죄의 법에서 해방되었으므로 우리를 통치하는 것은 죄와 사망의 법이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사실상 인간은 두 종류의 지배아래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죄의 지배입니다. 또 하나는 성령의 지배입니다. 우리는 어떤 통치를 받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 3절 이하에 두 지배 중 어느 하나를 선택했을 때의 결과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육신을 따르는 경우로 이것은 죄의 지배 아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을 따를 경우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죄 아래서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죽음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을 따르는 길입니다. 성령을 따르는 길은 그 길을 따르는 자에게 생명과 평강을 열매로 가져다줍니다.
  육신을 따르는 사람은 그 생각이 육신의 욕구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에 따른 궁극적인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들은 육신의 욕구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해 적대적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육신에 속하여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없고, 하나님의 영적인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삽니다. 생각이 육신의 욕구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영국의 노예 제도 폐지자인 윌리엄 윌버포스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친구이며 영국의 수상이었던 윌리엄 피트에게 위대한 영국의 설교가인 리차드 세실의 설교를 들어보도록 종용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윌리엄 피트 수상은 단지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윌버포스는 세실의 설교가 자신의 친구의 마음 안에 구원의 믿음을 일깨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윌버포스와 함께 교회에 가기로 한 피트 수상은 세실이 설교하는 예배에 참석했고, 두 사람은 함께 앉아서 하나님의 진리가 강력하고 놀랍게 전파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윌버포스는 그의 친구 피트가 진리를 느끼고 전심으로 그 진리를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피트는 윌버포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윌버포스! 나는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네.” 분명한 것은 윌리엄 피트가 영국의 수상이었지만 그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에 맞추어져 하나님에 대해 귀가 닫혀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말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좇는 자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여러분,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죄 아래에서 육신의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은 죄의식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죽음에 이르는 길을 걷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의 양심은 우리의 죄를 생각나게 합니다. 죄를 생각나게 한 뒤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죄의식과 죄책감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과 등을 진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죄책감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적인 수치심을 갖게 됩니다. 그로 인한 낮은 자존감이 형성됩니다. 죄가 압박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인격 장애 또는 정신적인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죄의식이 되풀이 되면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결과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낙심하여 절망감에 빠져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울하게 되어 우울증을 앓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쉽게 근심하고 불안을 느끼고 무엇엔가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죽음으로 향한 삶의 모습입니다. 죄와 죽음의 지배아래 있으니까 자신을 죽이는 생각, 죽이는 말, 죽이는 행동을 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죽이는 말, 다른 사람을 죽이는 행동을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부정적인 말, 죽이는 말을 한다면 그는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어느 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은 집안의 가구들을 내다 팔아 술을 마시고 돈이 떨어지면 돈을 내놓으라고 아내를 심하게 구타한다네. 게다가 아내는 폐결핵에 걸려 자신의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태인데 원치 않은 임신까지 했지. 아이를 낳아도 잘 키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 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학생 하나가 재빠르게 손을 들고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낙태시켜야 합니다.” 그러자 교수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지금 베토벤을 죽였네. 그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태아는 베토벤이었네. 베토벤을 낳은 후 얼마 안 되어 그의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사망했지. 베토벤은 11세 때부터 극장을 돌며 예술을 시작했다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불행의 터널을 통과한 사람이었지만 불행의 조건을 오히려 위대한 음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창조적 조건으로 승화시켰지. 만약 그때 낙태되었었다면 어쩔 뻔했는가?”
  우리는 우리 나름의 기준을 갖고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때로는 자기중심적인 욕심에 따라 사람을 대합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말을 하고, 헤치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자기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자신의 이익에 위배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주고, 헤치고, 고통을 주고,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이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신과 신의 사자에게 복종하며 약해질 때, 너희들 간에 서로 분열하지 말라. ... 기도하라, 금식하라, 신의 인도를 구하라, 신께 도움을 요청하라...너는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너는 가장 행복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오, 신이시여! 나를 위해 모든 문을 여소서... 기도를 들으시고 구하는 자들에게 응답하시는 신이시여, 내가 당신의 도움을 구합니다.... 내 생명을 당신의 손에 의탁합니다.” 위의 첫 기도문은 9.11테러 사건의 주범들이 소지하고 있었던 ‘자살임무 지침서’중 일부입니다. 두 번째 기도문은 그들이 비행기에 탑승하던 때의 기도문입니다. 이렇게 철저히 신앙적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어떻게 수많은 생명을 살상할 수 있었을까요?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고 서로의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데, 어찌 다른 이들의 생명을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법을 깨닫지 못하고 육신적이고,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영을 따르지 않고 거짓된 영을 따라 육신에 얽매인 생각에 끌려 죽음의 행위를 하면서도 잘못을 알지 못합니다.
  오늘의 사회가 바로 이런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걱정이 됩니다. 여러분, 뉴스를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쉽게 자신의 목숨을 끊는지, 얼마나 쉽게 다른 사람을 헤치고 죽이는지, 얼마나 많은 사건이 죽음을 부르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따르는 사람은 그 생각이 성령의 요구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 결과 생명과 평안에 이릅니다. 영을 따르는 사람은 그 생각이 성령의 요구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해 수용적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이루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법에 순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사는 영에 속한 사람은 생명의 사람입니다. 생명의 사람은 살리는 사람입니다. 죽음의 생각, 죽음의 문화, 죽음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고, 평안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주는 사람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여러분을 다스리도록 육신의 생각을 멀리하고 있습니까? 육신적인 것에 대해 등을 돌리고 있습니까? 그래서 생명의 생각, 살리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죽이는 말이 아니라 생명의 말을 하고 있습니까? 죽이는 선택이 아니라 살리는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아시지요? 오랫동안 물과 파동에 대한 연구를 해온 에모토 마사루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는 5년간의 연구 끝에 물 결정 사진을 얻었는데, 그 결과는 정말로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사랑·감사’라는 글을 보여준 물에서는 완전한 아름다운 육각형 결정이 나타났지만 ‘멍청한 놈’ ‘바보’ ‘짜증나, 죽여 버릴 거야’ 등과 같이 부정적인 말에는 마치 어린애가 학대를 당하는 듯한 형상이 나왔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거나 부정적인 글이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보였을 때에 물은 살아있는 물이 아니라 일그러진 물, 죽어가는 물, 파괴된 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농작물을 키우는 데에도 농작물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놀라우리만치 그 결과가 다르다는 사실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대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아껴줄 때 식물들도
잘 자라고, 열매도 더 풍성하게 달립니다. 이것이 생명의 삶입니다. 살리는 행동입니다.

  사랑과 용서는 사람을 살리는 힘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일을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2003년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손에 85세 노모와 60세 부인, 35세 아들을 모두 잃은 것으로 알려진 ‘서울 구기동 사건’ 피해자 62세 고정원씨는 빌딩 주차관리원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족을 한꺼번에 잃게 한 ‘얼굴 없는 범인’이 자신의 가족과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는 유영철이란 사실이 밝혀지자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영철이 그렇게 나쁘게 된 것도 부모가 그런 걸 가르쳐서 그랬겠는가, 다 우리 사회가 가르친 것 아닌가”라며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국가가 인위적으로 또 한 사람을 죽이는 것 역시 원치 않는다. 죄는 밉지만 사형만은 시키지 말아주십시오. 그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죽은 내 가족들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유영철이 진정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기 위해 그를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이 그를 살리고 나도 사는 길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곳에 살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생명이 살아납니다.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친히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의 사람이 되기를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생명의 사람은 살리는 사람입니다. 생명을 키우는 사람입니다. 생명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잃어버린 영혼,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살려내는 사람입니다. 이 땅의 죽음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의 입으로 살리는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살리는 행동, 생명이 담긴 행동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생명의 말,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가정이 살아나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아직 말들이 살리는 말보다는 상처주고 죽이는 말을 쉽게 합니다. 생명의 언어가 가득하지 않는 교회는 상처와 죽음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새 생명에게 관심을 가지십시오. 이제 막 믿기 시작하여 영적으로 갓 태어난 새신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여러분, 가정에서 며느리가 애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이 시동생들이 아이를 윗목으로 밀어 놓고 자기들끼리 아랫목에 앉아서 애가 울든 말든, 애가 배가 고프든 말든, 애가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는 집안이 있다면, 그 집안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에 새가족이 등록하여 나오는 데도 전혀 관심도 없고, 새가족들이 신앙의 뿌리를 잘 내리고 성장하도록 돕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래놓고 전도해야 한다고, 주님의 지상명령을 따라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교회가 부흥해야 한다고, 왜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느냐고 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고 싶습니까? 생명의 성령의 지배를 받고 싶습니까? 육신을 따라 죄와 사망의 길을 걷고 싶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따라 생명의 길을 걷고 싶으십니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생명의 길에 서있음을 아시고, 생명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십시오.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의지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살리는 성령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살리는 성령님이 충만하도록 하십시오. 언제든지 내가 죽이는 일을 하고 있나? 살리는 일을 하고 있나를 확인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2011년 04월 03일
신문수 목사

List of Articles
주일예배 설교
 신앙생활에 대한 오해
· 일시  2011년 09월 18일
· 말씀  시편 103편 1~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너그러운 사람
· 일시  2011년 09월 11일
· 말씀  빌립보서 4장 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터닝 포인트
· 일시  2011년 09월 04일
· 말씀  사도행전 9장 1-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예수님께서 먼저 보시는 것
· 일시  2011년 08월 28일
· 말씀  마가복음 2장 1-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네 사람의 이름과 신앙
· 일시  2011년 08월 21일
· 말씀  마가복음 2장 1-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
· 일시  2011년 08월 14일
· 말씀  마태복음 24장 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주의 하십시오 !!
· 일시  2011년 08월 07일
· 말씀  마태복음 24장 3~14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두 인생의 종말
· 일시  2011년 07월 31일
· 말씀  누가복음 16장 19-3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불평 중독
· 일시  2011년 07월 24일
· 말씀  시편 37편 1~1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장롱 면허증
· 일시  2011년 07월 17일
· 말씀  야고보서 1장 2~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친구 예수님
· 일시  2011년 07월 10일
· 말씀  누가복음 7장 31~3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에클레시아
· 일시  2011년 07월 03일
· 말씀  마태복음 16장 13-2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주 없이 살 수 없네
· 일시  2011년 06월 26일
· 말씀  마가복음 5장 25~34절
· 설교  김대민 목사
   
주일예배 설교
 삼위일체의 신비
· 일시  2011년 06월 19일
· 말씀  요한복음 16장 12절~1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보혜사 성령
· 일시  2011년 06월 12일
· 말씀  요한복음 14장 25-2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순례자가 받은 세 가지 선물
· 일시  2011년 06월 05일
·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일어나 걸어가라
· 일시  2011년 05월 29일
· 말씀  요한복음 5장 1~9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언약적 공동체
· 일시  2011년 05월 22일
· 말씀  마태복음 19장 3~12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묶는 말 푸는 말
· 일시  2011년 05월 15일
· 말씀  베드로전서 3장 8-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가정이 살아야 합니다
· 일시  2011년 05월 08일
· 말씀  골로새서 3장 18-2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무엇을 물려주시겠습니까?
· 일시  2011년 05월 01일
· 말씀  사무엘상 2장 27-3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그 다음은 누구입니까?
· 일시  2011년 04월 24일
· 말씀  고린도전서 15장 20-2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바로 나 때문입니다
· 일시  2011년 04월 22일
· 말씀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험한 십자가
· 일시  2011년 04월 17일
· 말씀  에베소서 2장 12-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약입니까? 의사입니까?
· 일시  2011년 04월 10일
· 말씀  마태복음 9장 9-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생명의 성령의 법
· 일시  2011년 04월 03일
· 말씀  로마서 8장 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난 받는 사람
· 일시  2011년 03월 27일
· 말씀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통의 쓰나미
· 일시  2011년 03월 20일
· 말씀  디모데후서 3장 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
· 일시  2011년 03월 13일
· 말씀  이사야 58장 6-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묵은 땅을 갈아엎으십시오
· 일시  2011년 03월 06일
· 말씀  호세아 10장 12-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
· 일시  2011년 02월 27일
· 말씀  에스더 4장 12-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세 가지 적
· 일시  2011년 02월 20일
· 말씀  마태복음 16장 21-28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