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영상

sermon

양정교회 홈페이지와 YouTube 채널을 통하여 설교말씀과 강의를 영상/음성/스트리밍으로 제공해 드리고 있습니다. 2004년 8월 부터, 현재까지의 영상과 말씀 음원파일을 홈페이지를 통해 열람이 가능하며,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설교말씀 다시보기를 통해, 예배시간에 받았던 은사와 감동을 다시한번 회고하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등록된 설교영상 : 1,956
달걀이야기  [3179]
· 설교 일자 : 2011년 02월 06일
· 본문 말씀 : 요한일서 5장 1-12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신문수 목사님의 다른 말씀 보기

달걀이야기 (요한일서 5장 1-12절)
  지난 설 잘 새셨습니까? 명절을 지내려면 주부들은 음식을 만들고 차리고 치우고 하는 일이 보통 큰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명절증후군이라는 병명까지 나올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런데 명절 음식이든, 일반 요리를 할 때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이 달걀일 것입니다.
  김밥을 쌀 때 달걀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비빔밥에 달걀 후라이가 올려있지 않으면 뭔가 서운하고, 성의가 부족한 것 같기도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서 급식을 하니까 그런 추억이 없겠지만,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던 옛날 어려웠던 시절에 도시락 뚜껑을 열었는데 밥 위에 달걀후라이가 펼쳐져 있는 집 아이는 잘 사는 아이였습니다. 내심 속으로 다 부러워했지요. 달걀후라이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부산 사람이 서울에 가서 간짜장을 시켰는데 간짜장 위에 달걀후라이가 올려있지 않아서 주인에게 따진 사람이 있다더군요. 서울에서는 안 주는 줄 모르고 말입니다. 또 찜질방에 가면 구운 계란을 꼭 먹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옛날 소풍을 갈 때에는 삶은 계란은 단골 메뉴였습니다. 어린 시절 제 모교회의 목사님이 대심방을 하면 제 어머님이 우리 집에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때 상에 올라오는 것 중의 하나가 계란말이입니다. 이것은 달걀말이라는 말보다 계란말이라고 해야 더 맛있을 것 같습니다. 또 계란찜 요리도 있습니다. 달걀로 조림을 하기도 합니다. 목청 좋아지라고 날달걀을 열심히 먹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빵을 만들 때 계란이 필요합니다.
“계란이 왔어요! 계란이 왔어요!”라는 스피커 소리로 동네 골목 골목을 찾아오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달걀, 나이가 30인 사람이 자기 나이가 계란 한 판이라고 표현하는 바로 그 달걀, 이렇게 삶에 아주 밀접하고도 친숙한 달걀 이야기를 오늘 하려고 합니다.

  삶은 달걀과 같습니다. 신앙도 달걀과 같습니다. 달걀과 관련된 신앙의 원리와 오늘 본문 말씀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합니다.
  먼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닭이 먼저입니까? 달걀이 먼저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을 잘 못하는 분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어떻게 무엇을 창조하셨는지를 잘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각종 알들을 창조하셨더라’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조류 동물을 창조하시지 않고 새들의 알을 창조하셨다면, 아담과 하와는 동물 이름 짓는 일보다 알을 품고 부화시키는 일을 먼저 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알에서 깨어나 자란 새들을 봐야 무슨 이름을 짓든지 할 것 아닙니까?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지요. 그러니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분명히 닭이 먼저입니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492년 이탈리아의 탐험가 콜럼버스가 항해를 하다가 신대륙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환영하는 만찬회가 열렸습니다. 만찬회 석상에는 콜럼버스를 시기하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어떻게 하다보니까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일어서서 만찬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달걀을 보여주면서 “누구든지 이 달걀을 테이블 위에 똑바로 세워보십시오.”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둥근 달걀이 똑바로 쉽게 세워지겠습니까? 아무리 해도 세워지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세울 수 없는 달걀을 세워 보라고 한다고 투덜댔습니다. 콜럼버스는 달걀을 집어서 달걀 끝 쪽을 톡톡 두르려 조금 깼습니다. 달걀의 공기집이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나서 달걀을 세우니까 똑바로 섰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다시 투덜댔습니다. 그렇게는 누군 못 세우겠냐고 투덜댔습니다. 콜럼버스는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달걀을 똑 바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달걀을 세우는 법을 여러분이 다 보았습니다. 이제 여러분 모두가 달걀을 나와 같은 방법으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처음에는 여러분이 못한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발견했기 때문에 여러분도 그 대륙에 갈 수 있습니다. 나의 신대륙발견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간에 말씀드리려고 하는 내용은 콜럼버스의 신대륙이 아니라, 그가 달걀을 세운 것과 관계된 내용입니다. 여러분, 달걀은 껍질, 노른자위, 흰자위, 그리고 공기집 또는 공기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달걀을 삶아 껍질을 벗기면 달걀 끝 부분이 움푹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공기집입니다. 그 공기집 때문에 콜럼버스가 그 부분을 조금 깨트려 세울 수 있었습니다. 달걀 껍질 안이 꽉 차있지 않고 빈 부분, 모자라는 부분, 다 채워지지 않은 부분인 공기집이 있기 때문에 달걀이 외부의 충격을 받았을 때 달걀이 쉽게 깨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달걀의 공기집처럼 우리 인간도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 채워지지 못한 부분, 모자라는 부분, 완벽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한계가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안 되면, 교만해 집니다. 또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체로 완벽주의자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피곤하고, 다른 사람도 피곤해집니다. 자신의 기준으로는 완벽해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자신에 대해서도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여 괴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완벽을 요구하여 너그럽게 용납하지 못하여 대인관계에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이 깨어져야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모든 인간이 불완전하며,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친구관계에서도, 부부사이에도, 인간관계에서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서로 돕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달걀에는 무정란과 유정란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무정란이란 암탉이 혼자서 만들어낸 달걀입니다. 유정란이란 자연의 섭리대로 암수 합사하여 키우는 닭에 의해 생산된 달걀입니다. 무정란이나 유정란이나 다 먹을 수 있습니다. 무정란이나 유정란이 기본적인 영양 성분은 차이가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왜 유정란이 더 좋다고 할까요? 현재 대다수 무정란 생산방식은 대단위 밀집사육에 의한 대량생산입니다. 밤에도 전등을 밝혀놓고 24시간 산란을 유도하여 좁디좁은 닭장에 가둬놓고 오직 알을 생산하게 하는 달걀 생산 공장이 바로 무정란의 사육입니다. 이로 인해 닭들의 건강상태는 그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합니다. 이에 반해 유정란은 암탉과 수탁을 그대로 풀어놓고 키우니까 매우 건강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고, 각종 항생물질의 투여 없이도 강한 면역력을 지닌 매우 건강한 닭입니다. 산모가 건강해야 아이가 건강하듯 달걀도 그 어미가 건강해야 함은 당연하겠지요.
  무정란과 유정란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무정란은 아무리 어미닭이 품고 또 품고 있어도 병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빛깔이 좋고, 알이 크고 먹음직스럽다고 해도 무정란에서는 병아리가 부화되지 않습니다. 어미닭이 무정란을 21일간 품으면 무엇이 되느냐 하면, 썩은 달걀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정란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생명에너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고 못생긴 것 같은 달걀일지라도 그것이 유정란이면 그 달걀에서 병아리가 부화되어 나올 수 있습니다. 유정란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는 달걀이냐, 생명이 없는 달걀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는 사람이냐, 영원한 생명이 없는 사람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다릅니다. 인생의 삶의 내용이 다릅니다. 인생의 결과가 다릅니다.
  여러분, 마트에 가면, 약초 먹인 달걀, 목초란, 왕란, 특란 등 이름을 붙여 비싼 가격표를 붙인 달걀들이 많습니다. 별의 별 이름의 달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안에 생명이 없는 데. 그 달걀은 아무리 어미가 품고 있어도 병아리가 될 수 없는 데 뭐하겠습니까? 물론 계란후라이를 해 먹거나 계란말이는 해 먹을 수 있습니다. 일회용 요리를 해 먹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달걀을 낳는 암탉으로 성장할 수 있는 병아리를 부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다 먹고 끝나는 달걀일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일회용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지금 이 세상에서 일회용으로 잘 사용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회용 인생으로 살려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습니다. 한번 멋지게 한 방 터트려 이름 날리고, 어쩌구 해 보십시오. 그게 인생이라면 그렇게 해 보십시오. 그렇지만 인생은 한 방이 아닙니다. 일회용이 아닙니다. 인생은 이 세상에서뿐만이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 인생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뿐이라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너무 순식간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달걀후라이로 끝나고 싶습니까? 아니면 생명으로 알을 깨고 나오는 인생이 되고 싶으십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죽고 끝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영원한 생명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무정란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유정란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달걀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인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습니까? 다른 말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구원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또 다른 말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11, 12절,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는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아들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은 생명을 가졌고, 그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은 생명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느냐는 질문을 거꾸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대속하여 죽으시고,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구세주이심을 믿습니까?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본문 말씀 1절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입니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은 아주 중요한 대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담긴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본래 이름은 예수입니다. 그리스도는 직위입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왕, 선지자, 제사장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 세움을 입었습니다. 메시야라는 말이 그리스도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말은 곧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말과 같이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모든 직무를 한꺼번에 완성할 수 있는 구세주에 대한 기다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고백 속에는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기 위해서 잘 복종해야 하고, 선지자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잘 배워야 하고, 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 앞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모든 짐을 위탁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마다 그 뜻을 새기고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메시야입니다. ”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성령님에 대해 내용을 알고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다는 것은 나의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내가 내 삶과 내 생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서는 끝이 죽음이요, 멸망이요, 영원한 벌에 던져질 뿐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라고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를 죽이고 예수님이 내 안에 주인으로 계시는 삶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구주로 믿음으로 주인으로 모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고백만 하지 말고, 실생활에서 주인의 명령과 말씀에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 4,5절,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 하나님께로 난 사람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세상을 이깁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시고, 죄와 죽음을 이기신 것처럼,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에서 ‘세상’은 세상의 유혹을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 말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이기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제도,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사탄의 궤계를 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거슬리는 세상의 삶의 방식을 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세상의 방식을 이깁니다. 세상을 무릎 꿇게 하는 승리의 힘은, 다름 아닌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믿음의 승리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세상의 삶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을 승리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 영원한 나라의 원리로 이 세상을 살다가 영생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 세상의 원리에 매여 살지 않고, 이 세상의 풍습을 따라 살지 않고, 이 세상의 가치관에 맞추어 살지 않고, 이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살지 않고,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가지 않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 우리를 통해 이루시려고 하는 것에 기준을 맞추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가 더 먼저이고, 더 중요합니다. 사람의 기준과 관점은 바뀔 수 있지만, 하나님의 기준과 관점은 동일합니다. 사람은 사람에 따라 그 기준과 관점이 다양하지만, 하나님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 가에 초점을 맞추고, 기준을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방식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방식을 뛰어넘어 하늘의 방식에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신령한 삶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굉장히 능력이 많거나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거룩하고 정결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한일서 4장 4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는 말씀처럼,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승리는 이미 확보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보다 크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죄악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달걀을 깨뜨린다고 다 병아리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달걀이 외부에서 다른 충격이나 힘을 가해서 깨뜨리면 달걀 후라이를 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달걀 내부에서부터 달걀을 깨고 나오면 새생명이 태어납니다. 유정란이 병아리로 깨어나려면, 21일 동안 품고 있을 껍질이 필요합니다. 그 껍질을 깨고 나와야 진정한 생명의 성장이 시작됩니다. 누에고치를 스스로 뚫고 나와야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 수 있듯이 고통의 과정을 겪고 나야 진정한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미 닭은 유정란 달걀을 품고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어미 닭이 품고 21일간, 3주간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어떤 생명도 쉽게 태어나지 않습니다. 생명은 고귀합니다. 생명은 존귀합니다. 인내의 시간, 인고의 시간,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생명의 탄생과 생명의 성장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은 한꺼번에 성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방에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견디어 내야 합니다.
  여러분, 껍질이 없는 달걀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내용물만 있는 달걀입니다. 노른자위도 있는 것 같고, 흰자위도 있는 것 같은데 껍질이 없습니다. 암닭을 잡다 보면 뱃속에서 미처 달걀을 제대로 만들지 못해서 이런 상태의 달걀이 그냥 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달걀과 같은 신앙은 훈련 없는 신앙을 말합니다. 훈련없는 신앙은 또 다른 생명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시간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없이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훈련없이 예수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인내하십시오. 경건의 훈련을 하십시오.
  달걀이 생명으로 부화되기 위해서는 노른자위가 필요합니다. 노른자위에서 생명에게 영양분이 공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껍질은 있는 데 노른자위가 없는 신앙이 있습니다. 달걀 껍질 안에 흰자위로 가득 채워진 달걀을 말합니다. 이런 신앙을 바리새인 신앙이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완벽한 달걀로 보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자기 노력과 힘으로 구원을 이루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구원을 이루었느냐 하면, 구원을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교만하고, 나름대로 자기식의 신앙 목표를 이루려고는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복음은 생명이 있는 진리입니다.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종교생활을 하지 말고, 생명이 있는 신앙,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이 태어나게 하고, 생명을 성장시키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이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데, 오히려 세상에 지는 사람, 세상에 휩쓸리는 사람, 세상과 구별이 안 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아 예수님의 생명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의 생명이 날마다 자라나고 훈련되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예수님의 생명이 점점 시들시들해져가고, 그 생명이 자라나지 못하여 갓난아기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신앙생활의 목적이 잘못되어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려고 하지 않고, 그냥 예전의 살아온 방식으로 세상의 방식대로 살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는 일회용 인생을 사는 무정란 인생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을 살아야 하는 유정란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우리들에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도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생명이 자라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생명으로 세상을 이기고 있습니까?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성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이기는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1년 02월 06일
신문수 목사

List of Articles
주일예배 설교
 신앙생활에 대한 오해
· 일시  2011년 09월 18일
· 말씀  시편 103편 1~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너그러운 사람
· 일시  2011년 09월 11일
· 말씀  빌립보서 4장 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터닝 포인트
· 일시  2011년 09월 04일
· 말씀  사도행전 9장 1-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예수님께서 먼저 보시는 것
· 일시  2011년 08월 28일
· 말씀  마가복음 2장 1-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네 사람의 이름과 신앙
· 일시  2011년 08월 21일
· 말씀  마가복음 2장 1-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
· 일시  2011년 08월 14일
· 말씀  마태복음 24장 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주의 하십시오 !!
· 일시  2011년 08월 07일
· 말씀  마태복음 24장 3~14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두 인생의 종말
· 일시  2011년 07월 31일
· 말씀  누가복음 16장 19-3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불평 중독
· 일시  2011년 07월 24일
· 말씀  시편 37편 1~1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장롱 면허증
· 일시  2011년 07월 17일
· 말씀  야고보서 1장 2~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친구 예수님
· 일시  2011년 07월 10일
· 말씀  누가복음 7장 31~3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에클레시아
· 일시  2011년 07월 03일
· 말씀  마태복음 16장 13-2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주 없이 살 수 없네
· 일시  2011년 06월 26일
· 말씀  마가복음 5장 25~34절
· 설교  김대민 목사
   
주일예배 설교
 삼위일체의 신비
· 일시  2011년 06월 19일
· 말씀  요한복음 16장 12절~1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보혜사 성령
· 일시  2011년 06월 12일
· 말씀  요한복음 14장 25-2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순례자가 받은 세 가지 선물
· 일시  2011년 06월 05일
·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일어나 걸어가라
· 일시  2011년 05월 29일
· 말씀  요한복음 5장 1~9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언약적 공동체
· 일시  2011년 05월 22일
· 말씀  마태복음 19장 3~12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묶는 말 푸는 말
· 일시  2011년 05월 15일
· 말씀  베드로전서 3장 8-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가정이 살아야 합니다
· 일시  2011년 05월 08일
· 말씀  골로새서 3장 18-2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무엇을 물려주시겠습니까?
· 일시  2011년 05월 01일
· 말씀  사무엘상 2장 27-3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그 다음은 누구입니까?
· 일시  2011년 04월 24일
· 말씀  고린도전서 15장 20-2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바로 나 때문입니다
· 일시  2011년 04월 22일
· 말씀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험한 십자가
· 일시  2011년 04월 17일
· 말씀  에베소서 2장 12-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약입니까? 의사입니까?
· 일시  2011년 04월 10일
· 말씀  마태복음 9장 9-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생명의 성령의 법
· 일시  2011년 04월 03일
· 말씀  로마서 8장 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난 받는 사람
· 일시  2011년 03월 27일
· 말씀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통의 쓰나미
· 일시  2011년 03월 20일
· 말씀  디모데후서 3장 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
· 일시  2011년 03월 13일
· 말씀  이사야 58장 6-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묵은 땅을 갈아엎으십시오
· 일시  2011년 03월 06일
· 말씀  호세아 10장 12-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
· 일시  2011년 02월 27일
· 말씀  에스더 4장 12-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세 가지 적
· 일시  2011년 02월 20일
· 말씀  마태복음 16장 21-28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