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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  [3201]
· 설교 일자 : 2011년 01월 23일
· 본문 말씀 : 아모스 8장 11-14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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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 (아모스 8장 11-14절)

  한 늙은 선원이 여러 차례 바다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그에게 멋진 나침반을 사주었습니다. 다음번에 바다에 나갈 때 그는 그 나침반을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그는 속수무책으로 혼동되어 육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또다시 친구들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짜증이 난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자네, 도대체 왜 우리가 사준 그 나침반을 사용하지 않았나? 우리를 이렇게 고생시키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 늙은 선원이 대답했습니다.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니까! 나는 북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나침반 바늘이 북쪽을 향하게 하려고 해도 그게 계속 남쪽만 가리키고 있는 거야!” 그 노인은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이 북쪽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북쪽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에 나침반을 맞추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나침반의 안내를 무시하고 그것을 한쪽으로 치워 놓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생각대로 방향을 고집했습니다.
  여러분, 무식하고 고집 세고 목소리 큰 사람하고는 상종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감당이 불감당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그랬습니다.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맘대로, 자기 욕심대로,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마치 고집 센 노새처럼 채찍이 날라 오기 전에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해 수없이 많은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책망과 회개와 권면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선지자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언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본문 말씀의 상황과 우리 사회의 상황을 비교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깨닫고자 합니다.     주전 8세기에 선지자 호세아, 미가, 이사야와 동시대에 예언을 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이 죽고 난 후, 남북으로 나뉜 지 거의 2세기가 지난 때였습니다. 아모스는 남 유대 출신이었지만, 북이스라엘에 가서 예언을 하라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모스가 예언을 할 때에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나라는 부강하였습니다. 하지만 큰돈은 모두 소수 부자들이 쥐고 있었고, 국민 생활은 약자에 대한 억압이 만연했고, 물질적 번영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찼습니다. 환락 산업이 발달했고, 거짓 종교로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타락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도 하나님을 가장 노엽게 한 것은 이스라엘의 썩은 종교였습니다. 다른 정치, 경제, 사회, 도덕적 죄악들은 썩은 종교의 샘물에서 흘러나온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세워 우상을 섬기게 했고, 남쪽 유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내려가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 결과 이방 종교인 바알신 경배의 요소가 스며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는 했지만, 점점 더 이방 종교의 신관과 사고방식과 습관들이 스며들어 형식적인 신앙이 되어버렸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이 같은 신앙 형편은 우리 세대의 처지와 너무도 흡사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고작 ‘주일날 교회에 나가는’ 것이 전부인양 생각합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주일날만 교회에 갔다 오는 신앙인을 선데이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선데이크리스천은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을 배우려는 관심이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분명하게 붙들고 확신하며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이 없습니다.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때우기식 예배를 드립니다. 주일예배 드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여러분, 주일 예배가 부담스럽습니까? 자주 돌아오는 것 같습니까? 여러분 가운데에는 주일이 너무 빨리 돌아오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주일에 예배드리면 되지, 뭘 그렇게 꼭 드려야 하나?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자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 같아도 실제로 계산 해 보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70년으로 계산하여 그 70년 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는가를 계산한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으시지요? 하루에 잠을 8시간 잔다고 한다면, 70년 인생 중 잠자는 데 보내는 시간이 23년을 사용합니다. 그렇게 계산해 보니까 먹고 마시는데 6년, 여성의 경우 물건 사려고 고르는데 3년, 전화기 붙들고 있는데 1년, 멍 때리는 데 1년 반을 보냅니다. 그런데 주일 예배를 1년 52주 안 빠지고 드린다고 할 때, 예배시간을 교회에 오고 가는 시간까지 합쳐서 3시간을 잡아도, 70평생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사용하는 시간은 결국 1년 하고 100일밖에 안 됩니다. 여러분, 형식적인 신앙을 버리십시오.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마십시오. 주일예배를 중요하게 여기십시오. 무엇보다도 예배에 마음을 다하십시오. 예배드리는 것을 실패하는 사람은 신앙도 실패합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사람치고 신앙이 바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은, 징계를 받으면서도 선지자의 외침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기근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기근이라는 것이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게 되는 기근도 아니고, 비가 오지 않고 물이 없어서 목말라 죽는 기근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에 대한 배반, 그리고 그토록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신 책망과 경고와 회개를 촉구하시는 자비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가뭄이나 흉년이나 자연 재앙으로 기근을 보내시겠다는 말씀이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지 않으시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들으려고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 결과 모두 다 말씀에 갈하여 쓰러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거두어 가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3년 동안 가뭄이 계속되는 것과 3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 중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여러분은 10년 동안 흉년이 계속되는 것과 1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도 듣지 못하는 것 중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선 목마른 것보다 하나님 말씀을 못 듣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10년간 곡식이 떨어져 굶어죽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10년간 듣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당장 목말라 죽는다든지, 굶어 죽는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거두어 가시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없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 어떤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내리실 수 있는 가장 큰 징계입니다. 굶어 죽는 것과 목말라 죽는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한 재앙이요, 저주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왜 그리 큰 저주가 될까요? 어떤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큰 징계이고, 큰 재앙이라는 말입니까?

  이 세상이 창조 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의 기초와 질서와 가치관을 형성케 하고, 말씀으로 인생의 행복이 풍부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삶속에 역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영이 고갈됩니다. 그러면 사람은 시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살았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당장은 편할 것 같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이것 하지 말라, 저것 하지 말라, 이리로 가라, 저리고 가서는 안 된다... 이런 말씀들을 듣지 않아도 되니, 마음에 부담이 없어지고, 자유를 느끼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학생들이 교실에 선생님이 없으면,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마음대로 떠들 수 있고, 공부를 안 해도 되고, 끼리끼리 놀아도 되고, 친구를 괴롭혀도... 여러분, 집에 부모가 외출하고 없으면 아이들끼리 남아서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부모님 잔소리를 듣지 않게 되고,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놀고, 맘대로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고, 무슨 짓을 해도 부모님께 꾸중을 들을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신나고 편하고 자유롭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시간이 한 두 시간이 아니고 하루 이틀 사흘 한 달 두 달 계속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신나고 편한 것이 아닙니다. 불행이고, 재앙입니다. 미래가 암담한 것입니다. 그러다 문제가 생깁니다. 잘못된 길로 빠집니다. 그러다 어떤 문제가 생기고 위기를 만나면 꼼짝 없이 불행을 겪어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사사시대의 상황을 기억하십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욕심대로, 자기 판단대로, 자기중심적인 생각대로 살아가니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도덕과 타락과 끔찍한 범죄들, 그리고 파멸이 다가오게 됩니다. 한 개인의 타락이 공동체를 타락시키고 파멸로 끌고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두어 가신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들끼리 잘 살아보아라! 내 말을 안 듣게 되거든 너희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보아라! 갈 때까지 가 봐라! 그리고 그 결과 망해 보아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두어 가신다는 것은 절대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를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어떤 남편은 아내와 같이 차를 타고 갈 때, 교차로 앞에서 신호가 떨어지면 남편에게 “좌회전!” 혹은 “직진”하며 일러준답니다. 남편은 그때마다 기분이 나빠서 “여보, 가만히 좀 있어!”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 남편은 운전할 때 옆에 멋진 외제차가 있으면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 신호가 바뀌어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아내에게 “그래도 신호는 다 보고 있으니까,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죄회전 차선의 제일 앞에 서 있는데,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아내가 남편을 쿡 찌르면서 “여보, 좌회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남편은 그 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그 순간 화가 나서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아예 출발을 하지 않고 서 있자, 뒤차들이 빵빵거리며 난리가 났습니다. 아내의 얼굴이 벌게지며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내는 그 뒤로 절대 신호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남편은 내심 ‘이제 마누라 교육을 제대로 시켰구나.’ 생각하고 뿌듯해 했답니다. 여러분, 운전에 집중하지 않고 딴 짓하는 것을 바로 잡아주는 아내의 소리가 없으니까 지금 당장은 편할지 모르지만, 그 남편은 운전에 집중하지 않는 나쁜 버릇을 고치지 않는 한, 아내의 잔소리가 필요합니다.
  아내의 사랑의 잔소리가 사라지고 난 후, 그 남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신호등 앞에서 대기 중인 그 남편은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까요? 자기 목적지를 제대로 잘 가고 있을까요? 운전을 제대로 하고 다녔을까요? 그 다음에 나타날 상황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 남편이 조금이라도 철이 들었다면, 자신의 아내의 말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음을 뒤늦게라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양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교양을 늘리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상식이 풍부해지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곧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들으며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며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며 내 삶 속에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이 움직여지고 질서가 유지되는 밑바탕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흐르고 있습니다. 십계명과 같은 기준이 중심을 잡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울타리요, 진리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갖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두어 가신다는 뜻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난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떠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으면, 옳고 그릇된 것에 대한 절대적인 표준이 땅 속에 묻혀버리게 됩니다. 기준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중심없는 삶을 삽니다. 방향없는 삶을 삽니다.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들의 분별력과 자제력과 도덕성과 양심은 너무도 쉽게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불법과 절망이 사회를 휩쓸고 사람들의 마음은 더럽혀집니다. 여러분, 얼마 전 경기도 양주에서 발생한 개 연쇄 학살 의혹이 밝혀졌습니다. 9마리의 개가 사라지고 죽은 채로 발견이 되어 수사에 나섰는데, 그 사건은 다름 아닌 7명의 고등학생들이 저지른 짓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집의 개를 몰래 끌고 가고 훔쳐다가 둔기로 때리고, 발로 차고 무차별 학살을 했습니다. 왜 그랬느냐고 묻는 말에 그들은 “그냥 재미 삼아 그랬다.”고 대답했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들이 학교에서 문제 학생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참 인간의 삶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사회가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뉴스 마다 패륜적인 사건들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친 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사건들, 존속 살인 사건들, 엽기적 연쇄 살인 사건들이 왜 그리 많이 일어납니까? 우리 사회가 왜 총체적으로 타락하고 있습니까? 이 땅에 성경책이 없어서입니까? 교회가 없어서입니까? 강단에서 말씀이 선포되지 않아서입니까? 아닙니다. 첫째는 저를 포함한 목사들의 책임이요, 둘째는 교회의 중직자들의 책임이요, 셋째는 모든 한국교회 교인들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서 실천되고 실현되게 하지 못한 책임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욕망따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듣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공산주의를 만든 마르크스도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공산주의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세계 역사의 실패한 이데올로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속에서 살게 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도 어렸을 때, 교회학교에 다녔습니다. 성경을 알았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어설프게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똑바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그렇게 더 사악한 인간이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오지 않는 성도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메마르고 완악해졌는지 발견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교만을 깨닫지 못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처음부터 완악해집니까? 처음부터 교만해집니까?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만이 아니라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니까 자기 생각대로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자기 생각에 확신을 가지니까 자신을 높이게 되고, 하나님을 무시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도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죄를 짓고서도 회개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이 두렵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 영혼이 더 완악해지고 타락하면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짓는 줄도 모릅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이 되어, 결국 금수만도 못한 사람, 개만도 못한 사람, 사람의 탈을 쓴 짐승으로 살아갑니다.

  조 세희씨가 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의 첫 장 ‘뫼비우스의 띠’에는 어느 수학 선생님의 수업시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학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두 사람이 굴뚝 에 들어가 청소를 하였다. 한 사람은 얼굴이 굴뚝 그름으로 더럽혀졌고, 한 사람은 깨끗했다. 둘 중에 어떤 사람이 얼굴을 씻을 것 같으냐?” 한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얼굴이 더렵혀진 사람입니다.” “틀렸다. 두 사람 중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 자기 얼굴을 씻었다. 왜냐하면 얼굴이 더럽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얼굴이 깨끗하니까 자기 얼굴도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씻지 않았고, 얼굴이 깨끗한 사람은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이 더럽혀졌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 얼굴을 씻었다.” 그러고는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두 사람이 굴뚝에 들어가 청소를 하였다. 한 사람은 얼굴이 굴뚝 그름으로 더럽혀졌고, 한 사람은 깨끗했다. 둘 중에 어떤 사람이 얼굴을 씻을 것 같으냐?” 학생들이 대답을 했습니다. “얼굴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틀렸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두 사람이 굴뚝에 들어가서 청소를 했다면 둘 다 얼굴이 더럽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앙인은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서 자신의 얼굴을 씻는 사람이 아닙니다. 굴뚝을 청소했다면 분명히 얼굴이 더럽혀졌을 것을 알고 씻을 줄 아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자신이 죄 많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며, 죄를 짓고 있음을 잘 압니다. 그래서 상대방과 자기를 비교해서 자신이 죄인이다, 아니면 의인이다라고 단정 짓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웁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자신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 앞에서 자신을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청교도의 에피소드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려면 입교 문답을 해야 했습니다. 입교 심사를 하는 위원회가 있어서 그 사람을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일지를 심사하는데, 한 자매가 문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든 장로님 한 분이 질문을 했습니다. “자매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인정합니까?” 그 자매는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장로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님을 믿은 뒤에는 자신을 어떻게 느끼고 있습니까?” 자매는 “지금은 전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장로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기 전과 예수님을 믿은 뒤에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이때 그 자매가 했던 대답이 아주 유명한 말이 되어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답니다. 그 자매의 대답은 “전에는 제가 죄를 향해 달려가는 죄인이었지만, 지금은 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죄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지, 우리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를 바로 깨닫고 죄에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가까이합니다. 귀 기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온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합니다. 실천합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아니라 듣지 않음으로 기갈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음으로 말씀의 기갈, 영적인 기갈이 왔습니다.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 위에 우리가 바로 서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야 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 이 세상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새로워지고, 한국교회가 사명을 감당하고, 사회적 신뢰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1년 01월 23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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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에클레시아
· 일시  2011년 07월 03일
· 말씀  마태복음 16장 13-2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주 없이 살 수 없네
· 일시  2011년 06월 26일
· 말씀  마가복음 5장 25~34절
· 설교  김대민 목사
   
주일예배 설교
 삼위일체의 신비
· 일시  2011년 06월 19일
· 말씀  요한복음 16장 12절~1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보혜사 성령
· 일시  2011년 06월 12일
· 말씀  요한복음 14장 25-2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순례자가 받은 세 가지 선물
· 일시  2011년 06월 05일
·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일어나 걸어가라
· 일시  2011년 05월 29일
· 말씀  요한복음 5장 1~9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언약적 공동체
· 일시  2011년 05월 22일
· 말씀  마태복음 19장 3~12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묶는 말 푸는 말
· 일시  2011년 05월 15일
· 말씀  베드로전서 3장 8-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가정이 살아야 합니다
· 일시  2011년 05월 08일
· 말씀  골로새서 3장 18-2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무엇을 물려주시겠습니까?
· 일시  2011년 05월 01일
· 말씀  사무엘상 2장 27-3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그 다음은 누구입니까?
· 일시  2011년 04월 24일
· 말씀  고린도전서 15장 20-2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바로 나 때문입니다
· 일시  2011년 04월 22일
· 말씀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험한 십자가
· 일시  2011년 04월 17일
· 말씀  에베소서 2장 12-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약입니까? 의사입니까?
· 일시  2011년 04월 10일
· 말씀  마태복음 9장 9-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생명의 성령의 법
· 일시  2011년 04월 03일
· 말씀  로마서 8장 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난 받는 사람
· 일시  2011년 03월 27일
· 말씀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통의 쓰나미
· 일시  2011년 03월 20일
· 말씀  디모데후서 3장 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
· 일시  2011년 03월 13일
· 말씀  이사야 58장 6-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묵은 땅을 갈아엎으십시오
· 일시  2011년 03월 06일
· 말씀  호세아 10장 12-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
· 일시  2011년 02월 27일
· 말씀  에스더 4장 12-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세 가지 적
· 일시  2011년 02월 20일
· 말씀  마태복음 16장 21-28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