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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의 패션쇼  [3036]
· 설교 일자 : 2010년 12월 12일
· 본문 말씀 : 마태복음 23장 1-12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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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의 패션쇼 (마태복음 23장 1-12절)
  해외여행 시 모든 국가가 전압과 콘센트의 모양이 다양하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여행 중에 우리나라에서 만든 헤어드라이어를 해외에서 사용하려면 해당국가의 전압, 플러그 모양을 꼭 확인해야 합니다. 미국처럼 우리나라와 동일한 모양의 플러그를 사용하는 국가도 있지만, 많은 국가들은 플러그 모양이 우리나라와 다릅니다. 아직 110볼트를 사용하는 국가도 있고, 220볼트를 사용하는 국가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용하는 전압이 같더라도 각각의 나라마다 사용하는 전기 플러그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국가별로 맞게 플러그 모양을 바꾸어 주는 플러그 아답터가 필요하게 됩니다. 콘센트 구멍이 두 개인 곳, 세 개인 곳, 두 개이지만 납작한 곳, 둥근 곳, 각기 다릅니다. 이렇게 다양한 콘센트에 꽂을 수 있는 것을 돼지코 멀티 아답터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사용하면 해결이 됩니다. 여하튼 콘센트와 플러그가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품일지라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기 코드를 꽂을 수 없으니 사용할 수 없는 것이지요.

  여기 나름대로는 열심이 있었지만 코드가 맞지 않아 메시야를 믿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언급된 바리새인들입니다. 지난주에는 사두개인의 신앙과 자세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두개인들은 220볼트가 흐르는 데 110볼트를 갖다 꽂으려 했으니 예수님의 복음이 감당이 안 된 것입니다. 사두개인과 같은 자세, 사두개인과 같은 플러그로는 예수님의 탄생과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사랑과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릴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말씀도 같은 초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파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아주 중요한 종교 당파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주전BC 135년 경 마카비 시대에 최초로 등장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 동안에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의 결과로 제사장보다는 일반 유대인들, 성전보다는 회당 중심으로 펼쳐왔던 움직임이었습니다. 사두개파나 에세네파와 함께 유대사회의 중요한 종파이었는데, 그중 가장 큰 세력을 지니고 영향력을 발휘했던 사람들이 바리새파였습니다.
  바리새파의 이름은 히브리어 ‘페루쉼’ 또는 아람어 ‘페리솨이아’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 뜻은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 이름의 뜻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 모든 불결한 것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하여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특히 정결 규정과 십일조 계명을 아주 엄격히 지킬 의무가 있었습니다. 정결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 구약성경에서 부정한 것이라고 규정된 것을, 즉 어떤 시체나 부정한 짐승을 접촉한 사람은, 혹은 몸이 부정한 사람은 누구나 그것 때문에 예배의 정결을 상실하였습니다. 이 정결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는 정결 목욕탕에 내려가야 했으며, 특별한 경우에는 그가 정결하다고 간주될 때까지 일정한 기간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었는데, 그것은 식사 기도할 때 깨끗한 손으로 기도하기 위해서였으며, 모두가 정결한 식사를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용하는 그릇들, 잔과 대접도 깨끗하게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정결하게 지키느라 바리새파 회원이 아닌 사람들과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십일조에 관해서는 율법의 문자 그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그 땅의 수확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구입한 것에서도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양념과 채소도 십일조를 드렸으며,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고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6천 명 가량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2만 5천에서 3만 명으로 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의 수가 상당히 많은 수였습니다. 주로 율법을 연구하는 서기관, 성전 제사에서 소외당하고 있던 제사장들, 율법대로 살기를 원하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가장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들이며, 산헤드린 공의회 일원이라는 점에서 일반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들 중에는 대율법학자나 경건한 지도자들도 많았습니다. 바리새주의는 계속 유지되어 정통 유대주의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천사와 영의 존재를 믿었고, 부활도 믿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지 못했을까요? 왜 메시야로 믿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어보면 그 어느 누구의 가르침보다도 명쾌하고 권세가 있으셨는데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반대했을까요?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많은 책망을 하셨고, 그들의 잘못을 들어 가르치셨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변화되지 않는 그들을 향해 왜 “화 있을진저!”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회칠한 무덤 같다고, 맹인 된 인도자라고 불같은 책망을 하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내용은 행하고 지키더라도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코드가 맞지 않았습니다.
  요즘 코드가 맞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요즘 소통의 코드가 맞아야 한다, 코드가 맞아야 일할 맛이 난다, 부부가 행복하려면 다섯 가지 코드가 맞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여기서 코드란 컴퓨터상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부호를 코드라고 말합니다. 또는 주파수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 공기 중에는 수많은 전파가 날아다닙니다. 이 예배실 안에도 온갖 전파가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전파가 내 귀에 다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내 휴대폰에 신호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파수가 맞아야 내 휴대폰이 울립니다. 주파수가 맞으면 예배시간에도 “와이리 좋노 와이리 좋노~”소리가 울리기도 하고, 유행가 노래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코드가 맞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대한 이해가 달랐고, 율법의 정신, 율법의 원리, 율법의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고자 한 열심은 많았지만 코드가 맞지 않는 열심이었기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자기들 식으로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고 확신에 찾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시는 것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차 없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정신을 잘못 알고 적용하는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열심히 행한 것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코드가 맞지 않는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드러내면서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율법에 대해 열심 있고, 의롭게 산다고 자신을 내세우는 교만을 범하였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행위가 의롭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죄는 지적하면서도 자신들의 죄는 깨닫지 못하는 위선을 범하였습니다. 결국 교만과 위선이라는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진실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려고 이마와 팔목에 성경 구절을 달고 다니고, 긴 장식 술로 치장한 채 높은 자리에 앉으며, 화려한 직위를 통해 그들의 종교성을 사람들에게 과시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허물과 연약함과 죄를 하나님께 진실하게 드러내고 회개하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감추고 가리려는 노력을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니 알맹이 없는 껍데기뿐인 종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으로 나오는 13-36절까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 말씀처럼,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이렇게 시작하여 여섯 번씩이나 그들의 외식을 지적하고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 진저”라는 말은 저주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내용이 없는 형식은 복음의 진리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겉만 깨끗하고 속이 더러운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식적인 종교 행위는 정신을 잃어버린 껍데기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기보다 남을 섬기는 자리에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틀려먹은 인생 이야기를 쓰면서 시시콜콜 맞춤법과 구두점을 따지고 있으니, 너희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기나 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의 주장과 생활 스타일과 행위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항상 부딪쳤습니다. 코드가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주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생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코드를 맞추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코드입니다. 아무리 열심을 다 해도 코드가 맞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코드가 맞아야 합니다. 이사야서 55장에는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과 다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에 코드를 맞추어야 됩니다. 우리 생각과 우리의 기준, 우리의 경험에다가 하나님을 맞추고 예수님을 맞추려고 하면 거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상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여러분의 코드를 맞추기 바랍니다. 복음에 여러분의 생각과 기준과 관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니까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습니다. 메마른 기계 마냥 언제나 뻑뻑했습니다. 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에도 은혜가 없고, 다른 사람의 삶에도 은혜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보다는 죄인들을 더 가까이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도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까? 정말 예수님께서는 죄를 좋아하셔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다른 죄인들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은 구별된 사람들이고 언제나 정결예식을 지키며 깨끗한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까이 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거나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자에게 의원이 쓸데 있고,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까?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가까이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자기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 전혀 은혜를 입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않고 자신들이 행한 의만 기억했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지게 받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느 정도 큰 죄인인지를 정확하게 알려면 성경 말씀을 살펴봐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읽으면 거울 앞에 선 모습처럼 우리의 죄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보다도 우리의 판단 기준과 감각에 따라 우리가 죄인인지 아닌지를 알려고 합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여러분, 조종사가 비행을 하다 보면 자주 '비행 착각'이라는 것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여객기는 주로 같은 방향으로 비행 하지만, 전투기의 경우 공중에서 빙빙 돌며 한참 날다 보면,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기 때문에 어느 쪽이 하늘이고, 어느 쪽이 바다인지 구분을 잘 못해서 당황할 때가 많다고 합니다. 또 같은 고도에서도 비행기가 선회 비행을 하면서 회전을 할 때는, 속력을 좀 내면 비행기가 자꾸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반대로 속력을 좀 늦추면 비행기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같은 고도에서 날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럴 때, 조종사는 자기의 감각에 의해 판단하지 말고 반드시 계기판을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비행 착각이 일어날 때에는, 조종사 자신이 어떻게 느끼든지 간에 계기판에 나타난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공중에서 사고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종사가 비행기를 조종할 때 비행 착각을 일으키는 것처럼,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 역시 자주 신앙 착각에 빠집니다. '신앙 착각'이란 무엇일까요? 실제로 비행기가 같은 고도에서 비행을 하고 있어도 조종사가 비행 착각에 빠져 다르게 느끼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생각이 분명히 다른데도 말씀보다는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믿는 신앙 착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비행 착각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계기판을 보아야 하듯이, 우리가 신앙착각 속에 빠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봐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앙 착각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주장과 행위가 항상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서부터 신앙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문제를 고치지 않으니까 점점 더 진리와 멀어지고, 진실과 멀어지고, 예수님의 복음과 멀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 착각에 빠지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보기를 게을리 하기 때문에 깊은 신앙의 착각 속에 빠져듭니다. 비행 도중에 계기판을 보지 않은 조종사는 자기의 감각과 판단만 믿는 것처럼, 성경을 읽지 않거나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은 신앙의 옳고 그름을 자기의 관념이나 기준으로써 판단하기 때문에, 말씀은 외면한 채 자기의 생각에 옳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믿습니다.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또 구원의 길을 가르쳐 줍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여 우리를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교우 여러분, 말씀을 가까이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의 삶은 끝없는 패션쇼였습니다.
  여러분, 패션쇼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직접 패션쇼 현장에 가서 본 적은 없습니다. 저희 집에 케이블 방송이 나오니까 채널을 돌리다 보면 패션쇼를 방영하는 채널이 있습니다. 그런데 패션쇼를 보면, 내 마음 속에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 옷을 누가 입고 다닐까? 어떤 옷들은 정말 특이해서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입을 수 있을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드는 옷들도 발표를 합니다. 어떤 옷은 입은 것인지 걸친 것인지 보기 민망한 옷들도 있습니다. 모르지요. 제가 모르는 사람들이 몰래 입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용적이지는 않아 보입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언급하신 말씀인데, 이것을 유진 피터슨의 [더 메시지]에는 이렇게 풀어서 번역을 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끝없는 패션쇼다. 오늘은 수놓은 기도 숄을 두르고, 내일은 현란한 기도를 올린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종교적인 행위를 하였습니다. 마치 종교적인 패션쇼를 하는 것 같다는 뜻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바리새인들에게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눈을 감고 다니는 형'입니다. 눈을 뜨고 다니면 유혹을 받고 죄를 짓게 되니까 죄 짓지 않으려면 눈을 감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눈 감고 다니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또 하나는 '어깨 으쓱형'입니다. 기회가 오면 선한 일을 하기는 하는 데 꼭 나팔을 부는 형입니다. "내가 이 일도 합니다. 내가 이 일도 할 것입니다. 내가 그 일을 했습니다."하고 나팔을 불고 다니는 바리새인입니다. '굽은 등형'입니다. 겸손을 가장해 늘 굽신굽신하기 때문에 그만 허리가 굽어져 버린 유형입니다. 그러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계산형'입니다. 만사를 더하기 빼기 식으로 계산하는 바리새인을 말합니다. 선한 일을 할 때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이 어느 정도인가를 먼저 계산하고 수지가 맞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하는 유형입니다.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이 많이 보는 데서 효과적으로 선행을 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형'입니다. 십일조를 안 바치면 내 사업에 손해가 올까봐서 바치고 안식일도 안 지키면 자식에게 해가 될까 해서 지키는 유형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부하면서 주변적인 장식을 달고 우쭐거리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정하고 있는,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하는 것을 다 드렸습니다. 절차대로 정확하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토라의 도덕적 판단을 중시했고, 잘못된 행실을 피했습니다. 그들은 수확의 십분의 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양념의 십분의 일도 드릴 정도로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 의에 가로막혀 하나님의 긍휼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 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제사법과 정결 예식 속에 담겨 있는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시는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을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인간을 구원하러 오시는 그 큰 사랑을 깨닫지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닫지도 경험해 보지도 못했으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으로만 믿었습니다. 마음이 함께 하는 행위가 아니라 종교적 행위의 패션쇼를 보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보이기 위해 종교생활을 했습니다. 겉만 보아서는 그럴듯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도 없는 주일 예배를 드리고서는 주일을 어기지 않고 지켰다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으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까? 아무 생각 없이 찬송을 따라 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한다고 눈을 감기는 했지만 머리속은 온갖 곳을 돌아다니고 별의 별 생각이 서커스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감사하는 마음 없이 인색한 마음만으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고서는 주보 헌금자 명단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 되었나 안 되었나 확인은 꼭꼭 하지는 않습니까? 직분 때문에, 목사니까, 장로니까, 안수집사니까, 권사니까,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 충만, 성령 충만, 믿음 충만한 것처럼,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애쓴 적은 없습니까? 억지로 봉사하고, 툴툴거리며 섬기고, 짜증과 불만스러운 사역을 하면서도 주의 일을 했다고 뿌듯해 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 말씀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고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지적하고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시늉만 내는 데 그치지는 않았느냐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습관이 되면 우리는 종교의 패션쇼를 하는 바리새인과 같이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처음부터 위선자가 되거나 처음부터 종교의 패션쇼를 하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겉만 꾸미는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형식적인 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한 가지 진실을 잃어버리고, 한가지 씩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아지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고, 세월이 흐르고 영혼이 둔감해져 가고, 어찌어찌 하다보니까 은혜는 메말라 가고, 감격도 사라지고, 껍질만 남은 조개껍질처럼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닳고 닳아서 바리새인처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우리 대신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신 동안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와 비밀을 왜 가르쳐 주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몸으로, 생명으로 보여주셨습니까?
우리가 삶의 목적을 찾고, 의미를 찾고, 가치를 찾고, 내용을 찾고, 사랑을 찾고, 진실을 찾고, 하나님의 마음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주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바리새인처럼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잃어버린 진실을 되찾아 위선과 가식과 교만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복음의 코드에 맞추어 사랑의 복음,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우리를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 지, 우리에게 얼마나 은혜를 베푸시려고 하시는 지를 깨닫고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깨달음과 경험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축하하고 감사할 수 있게 합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진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010년 12월 12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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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에클레시아
· 일시  2011년 07월 03일
· 말씀  마태복음 16장 13-2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주 없이 살 수 없네
· 일시  2011년 06월 26일
· 말씀  마가복음 5장 25~34절
· 설교  김대민 목사
   
주일예배 설교
 삼위일체의 신비
· 일시  2011년 06월 19일
· 말씀  요한복음 16장 12절~1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보혜사 성령
· 일시  2011년 06월 12일
· 말씀  요한복음 14장 25-2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순례자가 받은 세 가지 선물
· 일시  2011년 06월 05일
·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일어나 걸어가라
· 일시  2011년 05월 29일
· 말씀  요한복음 5장 1~9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언약적 공동체
· 일시  2011년 05월 22일
· 말씀  마태복음 19장 3~12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묶는 말 푸는 말
· 일시  2011년 05월 15일
· 말씀  베드로전서 3장 8-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가정이 살아야 합니다
· 일시  2011년 05월 08일
· 말씀  골로새서 3장 18-2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무엇을 물려주시겠습니까?
· 일시  2011년 05월 01일
· 말씀  사무엘상 2장 27-3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그 다음은 누구입니까?
· 일시  2011년 04월 24일
· 말씀  고린도전서 15장 20-2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바로 나 때문입니다
· 일시  2011년 04월 22일
· 말씀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험한 십자가
· 일시  2011년 04월 17일
· 말씀  에베소서 2장 12-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약입니까? 의사입니까?
· 일시  2011년 04월 10일
· 말씀  마태복음 9장 9-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생명의 성령의 법
· 일시  2011년 04월 03일
· 말씀  로마서 8장 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난 받는 사람
· 일시  2011년 03월 27일
· 말씀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통의 쓰나미
· 일시  2011년 03월 20일
· 말씀  디모데후서 3장 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
· 일시  2011년 03월 13일
· 말씀  이사야 58장 6-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묵은 땅을 갈아엎으십시오
· 일시  2011년 03월 06일
· 말씀  호세아 10장 12-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
· 일시  2011년 02월 27일
· 말씀  에스더 4장 12-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세 가지 적
· 일시  2011년 02월 20일
· 말씀  마태복음 16장 21-28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