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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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기다리십니까?  [2657]
· 설교 일자 : 2010년 12월 05일
· 본문 말씀 : 마가복음 12장 18-27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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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기다리십니까? (마가복음 12장 18-27절)
  어느 마을에 총각이 살았습니다. 그 총각은 옆 마을의 예쁘고 착한 처녀를 짝사랑했습니다. 그러던 총각이 용기를 내어 그 처녀에게 찾아가 청혼을 했습니다. “나와 결혼해 주시오!” 처녀는 수줍은 듯 대답했습니다. “말 두 마리 말고 소 다섯 마리예요.” 그 대답을 들은 총각은 소 다섯 마리 정도의 재산이 있어야 결혼하겠다는 소리로 듣고, 그 다음날부터 그 처녀와 결혼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 드디어 총각은 소 다섯 마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장가갈 수 있게 되었구나 생각하니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옆 마을 처녀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옆 마을의 처녀는 이 총각을 기다리다 못해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고 말았습니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진 총각이 실의에 빠져 두문불출하였습니다. 그 총각의 친구가 실의에 빠진 친구를 위로해 주러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총각의 친구가 하는 말, “아니, 이 친구야! ‘말 두 마리 말고 소 다섯 마리에요’ 라는 말은 소 다섯 마리 가지고 장가오라는 말이 아니고, ‘두 말 말고 오소!’ 그러니까 두 말 말고 얼른 장가오라는 뜻이었어!” 그 총각은 처녀의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해서 사랑하는 처녀를 놓쳐버렸습니다.
  지금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는 일이 거의 없지만, 옛날에는 다방에서 맞선 보는 일이 제법 많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다방에 선 보러 나갔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두 남녀를 중매 서는 중매쟁이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자기가 못 나가니, 남자에게 몇 날 몇 시 어느 어느 다방에 손에 꽃을 들고 나가고, 여자에게는 목에 예쁜 목도리를 두르고 나가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서로를 알아 볼 수 있는 표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약속한 날 정한 시간에 두 사람이 그 다방엘 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꽃을 든 남자도 없고, 목에 예쁜 목도리를 두른 여자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사정이 생겨서 꽃을 들고 가지 못했고, 목도리를 두르고 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분명 건너편 테이블에 한 남자가 사람을 기다리고 있고, 다른 쪽에는 한 여자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상대방이 꽃을 들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쁜 목도리를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맞선 보기로 한 사람이 안 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또 한 시간이 지나자 두 사람은 각각 화난 표정을 하면서 그 다방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만약 서로에게 다가가서 “혹시, 오늘 선 보기로 한 누구누구 씨 아니냐고 물어 보았더라면 만나서 결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얼마나 답답한 이야기입니까?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면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못 만나고 지나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든지, 서로 다른 관심 때문에 만나야 할 순간에 만나지 못 하고 스쳐 지나가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그렇고, 기회가 그렇고, 소중한 순간이 그렇게 스쳐 지나가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성육신 하셨습니다. 신약성경 복음서에는 그렇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만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메시야로 믿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메시아 예수님을 만났지만 믿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했고, 믿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생각, 메시야는 이런 모습일 거야라고 기대하는 기대에 갇혀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메시야로 깨닫지 못했고,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한 사두개인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0세 되는 해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는데, 그 당시 이스라엘 나라는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고, 이스라엘은 독특한 종교적 배경 속에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당파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리새파, 또 하나는 사두개파, 또 하나는 열심당, 그리고 에세네파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하고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내용입니다. 사두개인은 사두개파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들에 대한 명칭은 대체적으로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대 제사장이었던 사독에게서 유래했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히브리어로 의로운이라는 뜻의 “사딕”이라는 형용사에서 유래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정규적으로 대제사장을 배출해 온 이들은 부유하고 명망 있는 귀족 지배 계층으로 제사장과 예루살렘 권력가들로 이루어진 집단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입법, 행정, 사법 기관으로서 종교생활과 시민생활 일체를 통할했던 기관은 산헤드린공의회입니다. 공의회의 권한은 막강했습니다. 최고의장은 대제사장이고 로마에 의해서 임명되었습니다. 구성원들은 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산헤드린의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힐문이었습니다. 조롱하듯, 따지듯, 공격하듯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배우려고 묻거나 믿으려고 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사두개인 그들은 왜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왜 메시야 예수님을 메시야로 모시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기는 했을까요?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길 래 예수님을 오해하여 십자가에 죽이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까요?

  사두개인에 관해 기록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사두개인들의 신앙의 자세를 살펴보아 예수님의 성탄과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두개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18절에 간략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이 부활의 때에 일어날 상황에 대해 질문하는 의도는 정말로 진리를 듣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사두개인들이 제기한 질문은 죽은 사람들에게 부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공격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두개인들은 죽음이후의 삶에 대한 생각을 우스꽝스럽게 만들 수 있는 곤란한 문제를 찾아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질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혼법을 이해해야 합니다. 모세는 신명기 25장에, 한 사람이 아들이 없이 죽으면 결혼하지 않은 그의 형제(혹은 가까운 남자 친척)가 형수와 결혼하여 후사를 낳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명령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상속자를 낳음으로써 그 가문이 땅을 잃지 않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이것을 수혼법이라고 말합니다.
  모세 오경(창, 출, 레, 민, 신)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그들은 부활 신앙이 어리석은 신앙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터무니없이 긴 가설적인 상황을 설정하고 질문했습니다.    “7 형제가 있었는데 맏아들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었고,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취하였는데 또 후사가 없이 둘째도 죽었고, 또 셋째도, 넷째도, 다섯째도, 여섯째도, 일곱째도 다 후사가 없었고 결국 그 여자도 죽었다. 그렇게 되면 일곱 형제가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의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에 죽은 자에 대한 부활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 다음의 세상인 내세도 믿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세계,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고 지극히 현세적이었습니다. 로마의 통치 아래 일정한 독립과 권위를 허용 받았지만 로마 정부가 원한다면 그들의 재산권과 특권적 지위를 박탈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정부에 협력하는 것이 사두개인들에게 가장 유리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들은 로마에 협조하면서 재물과 평안과 권력을 누렸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현실에 매여 있느라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기를 싫어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또한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많은 권력과 힘으로 이 세상을 떵떵거리며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은 출생부터가 그들의 기준으로 보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며, 또한 정식 학교를 다니지 못한 배우지 못한 시골뜨기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어느 잔치에 가서 상석에 앉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고, 그들 자신이 상석에 앉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던 대제사장, 제사장, 서기관, 즉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을 빗대어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다른 방향의 삶은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두개인은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지만 세상의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의 헛된 신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입을 막아버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리새인들과도 함께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현실의 문제에만 집착하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온전히 모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두개인처럼 현세적인 것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잘못된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미래를 위해, 영원한 나라를 위해 준비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것에만 온통 집착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현실 세계 속에서 높은 자리, 더 많은 힘, 더 많은 소유를 얻기 위해 예수님을 믿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실망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세속적인 시각으로 더 높은 자리, 더 영향력이 있는 자리를 위해 눈을 번득이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21세기 사두개인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닮는 것보다 세상의 물질, 명예, 권력과 같은 것이 우상이 되어 있다면, 주님을 주님으로 모실 수도 없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주님이 둘 일 수는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주님을 주님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움켜쥔 것을 놓는 사람이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두개인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최고의 관심은 체제 유지였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을 지키고, 손에 쥔 것들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변화를 싫어하지요, 변화를 싫어하니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렬한 종말 대망을 품고 사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다시 부활하실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고, 그리고 다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현 체제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고 역사는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내세가 있다, 다가오는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고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기 위해 변화되어야 한다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복음이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이란 복된 소리, 기쁜 소식, 좋은 소식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이 가진 자가 구원받기 힘들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져야 한다, 누구든지 남을 대접하고 섬기는 자가 하늘나라에서 큰 자이다’라고 가르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3장 2절에는 예수님께서 성전의 돌들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말씀하셨으니, 성전을 중심으로 자기의 기득권을 쥐고 있는 사두개인들에게는 몹시 불쾌하고 제거해야 하는 위험인물로 보였던 것입니다.
  도무지 그들의 사고방식과 신앙의 수준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고, 믿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들의 신앙의 테두리를 딱 정해 놓고 그 안에서만 이해하고, 그 범위 안의 것들만 믿고, 그리고 현세적인 신앙 자세로 자신들이 가진 것을 절대로 버리려고도 하지 않고, 손에 움켜 쥔 것을 펴려고도 하지 않고, 지금의 자신들의 모습이 변해야 한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도 현실에 만족하느라 변화를 원치 않는다면 21세기 사두개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꺼이 변화되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은 복음일 수 없습니다. 지금 자신의 모습 자신의 삶이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자각, 변화되지 않으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 지금의 모습 그대로는 희망이 없다는 절망감, 지금의 나라는 존재로는 죄의 문제, 불안의 문제, 허무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그냥 무슨 볶음일 뿐입니다. 볶음밥이나 멸치볶음과 같은 볶음으로밖에 안 들릴 것입니다.  
목회자인 저에게 있어서 기쁨 중의 하나는 변화되어 가는 성도를 보는 기쁨입니다. 너무도 보람 있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는 교인을 보면, 특히 중직자를 보면 안타깝습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어떠하실까? 남들은 변화되어 신앙의 기쁨을 누리며 은혜 속에 사는 데, 왜 저 사람은 은혜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을까?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종교인으로 살지 마십시오. 신앙인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옛사람의 모습 그대로 살지 말고 새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꺼이 변화되어 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천국백성으로 변화되어 가도록 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변화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과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께로 변화되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24, 25, 27절에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의 신앙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살아계신 하나님도 크게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만 인정했습니다. 그러니 성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니 하나님의 뜻도 부분적으로만 알았고, 하나님의 능력도 온전하게 알지도 못했고, 경험해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사실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자신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자신들이 부활의 상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은 자들을 살리실 수 없다고 단정 지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생명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실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지상에서 누리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의 형태를 창조하실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으니까 살아 역사하시고, 삶에 구체적으로 다가오셔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고, 보호해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사두개인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나의 경험, 나의 관점, 나의 수준, 나의 사고 구조, 나의 이해력, 나의 차원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광대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손 안에 들어오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을 더욱 알기 위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깊이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진리인지 깨닫고 체험해야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소유, 더 강한 권력을 쥐어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새사람으로 변화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천국 백성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며 살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대강절은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할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사두개인들은 어떤 면에서 메시야를 기다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주님의 다시 오실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들은 21세기 사두개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현세에 누리는 것이 너무 좋아서 내세를 준비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려고 하지 않고,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성경도 하나님도 바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도 믿지도 않는 사두개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새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0년 12월 05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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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생명의 성령의 법
· 일시  2011년 04월 03일
· 말씀  로마서 8장 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난 받는 사람
· 일시  2011년 03월 27일
· 말씀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통의 쓰나미
· 일시  2011년 03월 20일
· 말씀  디모데후서 3장 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
· 일시  2011년 03월 13일
· 말씀  이사야 58장 6-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묵은 땅을 갈아엎으십시오
· 일시  2011년 03월 06일
· 말씀  호세아 10장 12-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
· 일시  2011년 02월 27일
· 말씀  에스더 4장 12-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세 가지 적
· 일시  2011년 02월 20일
· 말씀  마태복음 16장 21-28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