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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그러운 사람  [3057]
· 설교 일자 : 2011년 09월 11일
· 본문 말씀 : 빌립보서 4장 5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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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그러운 사람 (빌립보서 4장 5절)
  여러분,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9월 둘째 주일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며 안식하고 회복하고 재충전하는 날입니다. 예배에 나오신 교우 여러분께 하나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또 오늘은 추석 전날입니다. 비가 이렇게 오면 한가위 보름달 보는 것은 어렵겠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추석은 풍요, 넉넉함, 함께 어울림의 명절입니다. 즐겁고 여유롭고 넉넉하고 너그러운 명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이 또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10년 전 미국 뉴욕 맨하튼의 세계 무역센터를 테러당한 9월 11일, 9.11일입니다. 우리나라 모 일간신문에 리 아이엘피 9.11 가족연합회장과 인터뷰한 내용이 실렸습니다. 그는 당시 큰 아들과 함께 소방관이었는데, 그 때 구조작업에 참여한 큰 아들이 사망했습니다. 시신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진 청년들이 왜 자살 테러를 벌였는지 오랫동안 생각하면서, 그들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랐던 순간도 많았답니다. 그렇지만 차츰 분노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고민 고민하며 얻는 것이 있는데 관용을 베풀며 함께 사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이랍니다.
  요즘 세계 곳곳에서의 내전, 종족간의 갈등, 종교 분쟁, 테러 등 너무도 끔찍한 사건들이 계속됩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톨레랑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 말인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용납, 수용하는 정신을 말합니다. ‘관용’을 뜻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관용’이라는 말로 번역된 원어는 인내, 자제, 부드러움, 아량, 친절함, 너그러움 등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합리적이고 공평하며 자비로운 정신을 가리킵니다. 남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배려와 관용을 베풀려고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골목에서 차가 서로 마주보며 달려갈 때가 있습니다. 어느 한 차가 뒤로 후진하여 양보하지 않으면 서로 대치하게 됩니다. 그 때 너그러운 사람이 먼저 차를 빼주게 되어 있습니다. 밴뎅이같은 사람은 절대 꼼짝을 안 합니다. 작년에 교회에 오다가 골목에 차가 밀려서 보니까 골목 중간에서 차가 서로 마주보며 서로 비켜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반대쪽 차에는 운전석 위쪽 백미러에 십자가가 걸려있었습니다. 자신이 뒤로 후진하여 양보하는 것이 마치 인생에서 뒤로 밀려 패배하는 것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특별히 요즘 관용 즉 상대에 대한 너그러움을 생각하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흩어져 있던 가족들, 친척들이 함께 모여 즐겁고 화목하게 지내는 추석 명절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한가위에 맞는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권면한 말씀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 말씀은 관용으로 마지막 때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도 바울은 왜 주님의 재림이 가까우니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씀하실까요? 왜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라고 말씀할까요?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관용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로 지금도 계속적으로 너그럽게 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인지를 정직하게 알게 되면, 즉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허물이 많은 사람이고, 실수투성이 인 존재라는 것을 정직하게 알고, 그런 자신을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과 온유함으로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고, 참아주시고, 기회를 다시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관용의 은혜를 받은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아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실천하다 보면, 그것이 쉽지 않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관용이 얼마나 귀하고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관용을 실천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나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의 관용을 경험할 수 없겠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관용의 은혜를 우리가 받고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도 관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절, 2절 상반절,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으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를 받았으면 너희도 너그럽게 살아라. 이것이 복음적인 삶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복음적 사고는 너그러운 생각입니다. 율법적 사고는 율법대로 생각하고 율법대로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보니 융통성이 없습니다. 틀에 짜여 옴짝 달싹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연구하고 지킴으로 거룩하다는 것,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바리새파 이름에 ‘분리되다’는 뜻이 담긴 것처럼, 그들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과 자신들을 분리해서 생각했고, 자신들과 같지 않은 사람을 정죄했습니다. 관용이 없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이 땅에 우리를 위해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우리를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조건 없이 용서해 주셨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고,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데, 이 은혜의 복음을 받은 사람은 복음적인 생각, 복음적인 정신, 복음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따라 사는 삶에는 은혜가 있고, 용서가 있고, 이해가 있고, 배려가 있고, 온유가 있고, 양보가  있고, 인내가 있습니다. 이것이 관용입니다. 너그러운 사람이 되는 삶입니다.


둘째,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그리스도인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은 관용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덕목 중 하나로 말씀합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이 땅에서 가져야 할 덕목이 관용, 너그러움이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관용을 경험하려면 너희도 관용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왜 계속 은혜를 주실까요? 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왜 복을 주실까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의 자녀로써 살아가도록 은혜도 주시고, 복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매일 매일 새로운 기회도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천국의 모습을 믿음으로 맛보며 다른 사람들에게 천국의 삶을 맛보여 주는 삶이 아닙니까?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은혜의 나라인데,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여 주는 삶이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관용의 은혜를 우리가 실천함으로 우리의 관용을 알게 하는 삶입니다.
  교우 여러분,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백성이 되었다고 하면서 지옥 백성처럼 살아간다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면서 사탄, 마귀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면, 우리가 구원받아 영원한 나라에서 영생을 누릴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서 순간만을 위해, 이 땅의 현세적인 것, 이 세상만 살 사람처럼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마치 지옥에서 살고 있는 사람처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복수와 독을 뿜어내며 살아간다면, 누가 천국을 믿겠으며, 누가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겠으며, 누가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하나님 나라를 맛본 사람들인지 알겠습니까? 오히려 지옥 같은 모습에 놀라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 올수록 관용을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김 익두 목사님은 과거 ‘개망나니 김 익두’라고 불려졌던 분입니다. 깡패 김 익두라고도 불렸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목사가 되어 부흥회에 참석하려고 산길을 걷다가 잠간 윗저고리를 벗고 쉬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술취한 사람이 오더니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온 거야?”라며 시비를 걸며 사정없이 김 익두 목사님을 팼습니다. 김 익두 목사님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 매를 맞았습니다. 그리고는 술 취한 사람에게 “형님, 다 때렸습니까?” 라고 묻자 그가 “그래, 다 때렸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김 목사님은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형님이 받으셨군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래서 김 목사님이 “내가 김익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술 취한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니 “살려 주십시오.”라고 빌기 시작했습니다. 김 목사님은 그를 데리고 부흥회에 함께 참석했고, 그 일을 계기로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게 되었고, 훗날 장로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용서와 긍휼의 은혜를 술 취해 자기를 때린 사람에게 베풀었습니다.
  우리가 그 상황이 되면 김 익두 목사님처럼 할 수 있을지 참으로 자신할 수 없지만, 우리는 김 익두 목사님의 모습을 통해 닮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너그럽게 받아주셨고,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으니, 나도 다른 이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믿고 복은 다른 사람들도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심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각이나 행동에 조금이라도 옹졸함이나 비열함, 악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너그러움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 말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는 말씀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관용입니다. 너그러운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너그러운 사람은 양보할 줄도 압니다. 너그러운 사람은 화평케 하는 사람입니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너그러운 사람은 온유합니다. 너그러운 사람은 오래 참아 줍니다. 너그러운 사람은 이해를 잘 해줍니다. 너그러운 사람은 겸손에서부터 나오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너그럽게 대합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복을 주었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너그러움을 베풀었습니까?


  셋째, 어른이 된다는 것,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너그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아들 되찾은 아버지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집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미리 유산을 받아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며 다 날리고 결국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 손에 반지도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하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는데, 집에서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종을 불러서 이것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둘째 도련님이 돌아와서 주인님이 잔치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큰 아들은 화를 내면서 집에 들어가고자 아니했다고 말씀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나와서 큰아들을 달랩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볼 맨 소리를 말합니다.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열심히 일한 나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어 친구들하고 즐기게 하신 적이 없더니, 창녀들과 함께 노느라 유산 받은 것 다 날린 놈에게는 살진 소를 잡다니요? 이게 말이 됩니까?”
  아버지에게는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베푸는 관용이 있었지만 형은 동생에게 대한 관용, 너그러운 마음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형의 입장도 이해합니다. 전혀 이해 못할 일이 아닙니다. 재산이라는 측면과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만 보면 큰아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관점과 가족이라는 관점과 그가 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에게는 너그러운 마음이 없었습니다. 동생과 자기와 비교하여 일대 일의 동등한 관계로만 생각했습니다. 형으로서 동생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은 상대방을 자기와 같은 높이로만 보면 너그러운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바라 볼 때 너그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아무리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에 대해서 똑같은 인간 대 인간으로 보면 부모의 너그러움도 사라집니다. 괘씸하고, 서운하고, 자식이 원수가 됩니다. 내가 부모인데... 내가 너를 낳았는데... 내 새끼인데... 하면 생각이 달라지고, 가슴이 달라지고, 너그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진정한 의미의 윗사람만이 아랫사람에게 관용을 베풉니다. 아랫사람인데 윗사람의 옹졸함에도 불구하고 너그럽다면 그 아랫사람이 실제로 윗사람입니다. 큰 사람만이 작은 사람에게 관용을 베풉니다. 마음이 넓은 사람만이 마음이 좁은 사람에게 관용을 베풉니다. 여러분이 그 누가에겐가 관용을 베풀고 너그럽게 대한다면 여러분이 윗사람이요, 큰 사람입니다. 마음이 넓은 사람입니다.
  이미테이션 가수들이 있습니다. 소위 짝퉁 가수들입니다. 가수 나훈아씨를 흉내 내며 너훈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짝퉁가수가 있습니다. 가수 이미자씨 짝퉁 가수는 임희자로, 설운도씨는 설훈도로, 조용필씨는 조형필로, 현철씨는 현찰로, 주현미씨는 주영미씨로 활동하더군요. 그런 이름으로 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내가 생각하기를 본 가수들이 기분이 어떨까? 자기 이름을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르게 이름을 지어서 자기가 히트한 곡을 부르면서 자기 인기에 편승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기분 나쁘고, 괴씸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유명한 그 가수들은 짝퉁 가수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들이 있어서 고맙다고. 자기들이 바빠서 못 가는 곳에 그들이 대신 가서 노래해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더군요. 역시 스타가 괜히 스타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국민들의 인기를 받는 사람들이 괜히 그런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람들이니 너그럽습니다. 여러분이 너그러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큰 사람이 되는 것이요,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런 모습이 있지만, 젊었을 때는 빡빡했습니다. 원칙론자였습니다. 너그러움이 부족했습니다. 어떤 원칙이 제 마음 속에 있으면 그 원칙에서 벗어나면, 그것을 지적하든지 아니면 제 자신이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신목사가 지금도 너그럽지 못한데 그렇다면 옛날에는 어땠다는 거야?” 세월이 지나면서, 목회의 현장에서 여러 가지 상황과 다양한 교인들, 각각의 사연들, 아픔과 상처와 형편들을 목회자의 마음, 영적 부모와 같은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조금씩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조금씩 사랑의 마음으로 보게 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이해하고 품으려고 했습니다. 물론 아직도 내 자신을 내가 보아도 너그러움이 한 참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조금씩 더 너그러워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말은 너그러운 사람이 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관용을 베푸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도티 빌링턴이 쓴 [멋있게 나이 드는 법 46]이라는 책에는 인생의 목표가 영혼의 너그러움을 기르는 일이라고 말하는 친구를 소개합니다. 그는 인생을 사는 동안 때때로 갈림길과 마주치게 되는데 너그러운 마음으로 선택해야 하고, 내면에서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며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올 때면 마음의 방향을 바꾸어 너그러움의 길을 따라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멋지게 나이 드는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면 너그러워져야 합니다. 나이가 점점 들면서도 너그러워져 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나이를 헛먹는 것이고, 헛늙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삶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고, 많은 사연들을 만들며 삽니다. 실수도 하고, 이상한 일도 만나고, 생노병사 희노애락을 겪습니다. 그러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 인생에는 내 생각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나와 똑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 그래서 이 세상에 함께 숨 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 차이가 있고, 다양하고, 독특하며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함께 살 수 없다는 것 등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건을 겪을 그 당시에는 내 뜻대로 안 되면 숨이 넘어갈 것 같고, 밤잠을 못자며 혈기 왕성했는데 지나고 보니, 나이를 하나씩 자꾸 먹어 보니, 인생이 그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면서 삶에 여유, 너그러움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세월의 지혜를 깨달은 할아버지의 너털웃음 속에는 너그러움과 여유와 지혜와 덕이 담겨있습니다.
  지위가 올라갈수록 너그러워져야 합니다. 책임과 권한이 많아질수록 너그러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어른의 태도입니다. 어른다움입니다. 존경받는 비결입니다.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을 관용의 관점에서 표현하면 너그러운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가까워지면 질수록 상대에 대해 너그러워져야 합니다. 너그러운 사람은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시기와 질투가 많아집니다. 자존심을 앞세우는 사람은 너그러울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시기 질투가 많고,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재매임을 인정하고, 우리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함께 살 사람들이라고 믿고 확신한다면 서로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이 더욱 표현되어야 합니다. 너그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야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점점 더 많이 경험하면 할수록 너그러워져야 합니다. 너그러움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이 성품만으로 너그러운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원수에게도 너그럽게 용서와 자비와 긍휼을 베풀 수 있게 합니다.

  또한 너그러운 마음은 너그러움을 받는 대상만 누리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도 너그러움이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자신의 마음도 사랑으로 가득 차듯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갈 때 자신의 삶이 너그러워집니다. 여유가 생깁니다. 사물을 보고, 자연을 보고, 사건을 보고, 사람 사는 모습을 볼 때 너그러워집니다. 자신이 스트레스를 덜 받습니다. 긍정적인 것을 보게 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추구하게 됩니다. 너그러운 마음, 관용이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꼭 필요한 덕목이 관용, 너그러움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너그러우신 분이심을 알고,  여러분을 너그럽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사랑을 받았다면, 너그러운 그리스도인, 너그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너그러움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를 맛 볼 수 있고, 우리 또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가족이 모여 자녀들은 부모님의 자식을 향한 사랑, 희생적인 사랑에서 묻어 나오는 부모님의 너그러운 마음을 느끼고 배우는 추석, 너그러운 가족 모임이 되어 즐겁고 화목한 추석 명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형제간에 모여 대화할 때, 너그러운 마음으로 듣고 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관용이 절실한 이때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그리스도인의 관용을 보여주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1년 09월 11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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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우리는 세상의 소금 (i)
· 일시  2012년 01월 01일
· 말씀  마태복음 5장 13절 말씀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빛이 있으라
· 일시  2011년 12월 31일
· 말씀  창세기 1장 1~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소통하러 오신 하나님
· 일시  2011년 12월 25일
· 말씀  마태복음 2장 1-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 일시  2011년 12월 18일
· 말씀  로마서 15장 12-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구주
· 일시  2011년 12월 11일
· 말씀  누가복음 1장 46-5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의 나라
· 일시  2011년 12월 04일
· 말씀  마가복음 1장 14-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진짜와 가짜
· 일시  2011년 11월 27일
· 말씀  요한복음 1장 1-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믿는 자가 되라
· 일시  2011년 11월 20일
· 말씀  요한복음 20장 24~29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누가 찬양할 수 있습니까 ?
· 일시  2011년 11월 13일
· 말씀  시편 106편 1~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자족의 비결
· 일시  2011년 11월 06일
· 말씀  빌립보서 4장 10-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코람데오
· 일시  2011년 10월 30일
· 말씀  로마서 1장 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신앙생활에 대한 오해 IV (기도)
· 일시  2011년 10월 23일
· 말씀  요한일서 5장 13-1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은혜 아래 사는 사람
· 일시  2011년 10월 16일
· 말씀  로마서 6장 12~14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신앙생활에 대한 오해 III
· 일시  2011년 10월 09일
· 말씀  로마서 5장 17~2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새 언약의 몸과 피
· 일시  2011년 10월 02일
· 말씀  마태복음 26장 19-2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신앙생활에 대한 오해 II
· 일시  2011년 09월 25일
· 말씀  미가 7장 18-20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