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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는 삶  [3864]
· 설교 일자 : 2012년 07월 08일
· 본문 말씀 : 여호수아 24장 14-18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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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는 삶 (여호수아 24장 14-18절)
  옛 로마가 제국이 되기 전, 카이사르(케사르, 시저)가 갈리아(현재의 프랑스지방)총독임기를 끝내고 집정관에 출마하고, 갈리아 총독임기도 연장 받을 겸 로마로 돌아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로부터 그냥 갈리아에 있으라는 대답이 왔습니다. 이에 격분한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향합니다. 이게 기원전 49년 1월입니다. 루비콘강은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작은 강입니다. 갈리아와 로마의 경계였고, 이강을 건널 때는 로마에 대한 충성의 의미로 무장을 해제하고 강을 건너게 했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무기나 군대 없이 홀로 로마를 가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았기 때문에 자기 군대를 무장한 채 이끌고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며 말하며 루비콘강을 건넜습니다. 이것은 반란이었습니다. 기세등등한 카이사르가 로마에 당도하자 로마에 있던 폼페이장군은 도망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로마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 고사(故事)에서 유래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려서 사태에 대처하는 것을 “루비콘 강을 건너다”라고 합니다. 우리말에도, “물 건너갔다”라는 관용구가 있습니다. 물을 건너기 전과 물을 건넌 후에 상황이 바뀌었다, 이미 일이 시작되어 되돌릴 수 없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강을 건너는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단순화시켜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두 개의 강 곧 유프라테스 강과 나일강(또는 홍해)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는 사건과 나일강과 홍해를 건너는 사건은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기를 보면 자신들의 역사 속에 중요한 두 개의 강을 그려 넣었습니다. (01 이스라엘 국기 이미지를 보겠습니다.) 중앙에 그려진 다윗의 별은 다윗과 같은 메시야가 도래하여 세울 메시야 왕국을 기다리는 이스라엘을 의미하고, 위 아래로 그려진 두 개의 굵은 청색 선은 강을 상징합니다. (02 지도 이미지를 보겠습니다.) 위로는 유프라테스 강, 아래는 나일강까지 영토를 차지했던 다윗 시대의 영토를 상징합니다. 메시야 왕국이 도래할 때, 이 영토들도 회복될 것이라는 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이스라엘 국기 공부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강을 건너는 사건은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일이었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호수아서의 말씀도 강 건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본문 앞의 24장 1-13절의 내용과 연결된 여호수아의 설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모세가 죽고 난 후, 여호수아는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함락시키는 것으로 시작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열 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아 늙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더 늙고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온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삶을 살도록 결단을 촉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약속하신 땅을 주신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에서 거짓 신들을 섬기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강을 건너 온 것처럼,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을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14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그리고 만약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정복한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무엇을 섬길 것이지 지금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수아는 자신과 자신의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단호히 선언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세 종류의 강을 건넜습니다. 세 종류의 강을 건너는 사건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졌습니다. 강을 건너는 사건과 의미가 우리 인생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아브라함이 유프라테스강을 건넜고, 이스라엘 백성이 나일강을 건너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아브라함이 유프라테스강을 건넌 것과 이스라엘 백성이 나일강과 홍해를 건넌 것은 그 의미상으로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조상들과 살 때에, 그곳에서 그의 조상들은 우상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가운데에서 우상이 참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고,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부르시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 명령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강을 건넌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고, 새로운 삶을 향해 과거의 삶을 버리고 떠난 것입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을 때, 가뭄을 피해 이집트로 갔던 야곱과 그의 아들들과 자손들 70명은 고센이라는 땅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눌러 앉았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에서 눌러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통치하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노예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결국 43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야 이스라엘은 모세의 인도를 따라 이집트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입니다. 이것을 엑서더스라고 합니다. ‘나감, 출발, 탈출’이라는 뜻입니다.
  출애굽, 엑서더스는 바로 왕으로부터의 탈출이며, 애굽 문화 즉 우상 문화로부터의 탈출입니다. 바로 왕은 자신을 신격화하여 섬기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아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애굽의 문화는 우상문화입니다. 별의 별 신이 다 있습니다. 태양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코브라형상의 신, 풍뎅이 형상의 신, 개구리 형상 신, 암소 형상의 신, 원숭이 형상의 신, 매 형상, 독수리 형상, 악어 형상의 신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돌이나 나무나 금으로 만든 우상을 섬기는 우상문화였습니다. 거대한 우상 형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로부터 떠나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시 이집트의 발달한 문명과 힘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고 위대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모든 나라 백성들에게도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다른 모든 것들의 능력은 보잘 것 없는 것임을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일강을 건너고, 홍해를 건넌 것은 종, 노예로부터의 탈출입니다. 또한 나일강의 문화로부터의 탈출입니다. 나일강의 문화는 풍요의 문화였습니다. 나일강을 중심으로 비옥한 땅을 통해 많은 농작물들이 수확되었고, 풍요로운 물질을 누리며 향락의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출애굽은 풍요문화로부터의 탈출이었습니다. 풍요문화는 물질주의와 향락주의를 만들어내었습니다. 물질이 풍요로우니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향락을 일삼았습니다.    사람이 물질이 풍요로우면 다른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건강하고 돈 많고 시간이 많으면 다른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가난해서 먹고 살기 바쁜 사람은 다른 곳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고, 건강도 괜찮고, 시간이 여유로우면 쾌락, 향락을 찾습니다. 바른 정신과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딴 짓을 합니다. 바람을 피우든지, 두 집 살림을 하든지, 원조교제를 하든지, 이상한 짓거리를 해서 향락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게 인생의 기쁨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하니까 말입니다.
  사람이 문제가 생기고, 고난이 있고, 위기를 만나고, 시련을 당하면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해결이 되고, 편안하고, 별일이 없으면 다른 생각을 합니다. 무엇인가 허전하고 허무하고 부족한 것 같은 것을 채워줄 그 무엇을 찾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먹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입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소유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얻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권력을 얻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인생의 즐길 거리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쾌락과 향락으로 자신의 인생의 빈 부분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빈 부분이 채워질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채워도 채워도 그런 것들로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길도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처럼, 강을 건너야 합니다. 첫 번째 우리가 건너야 할 강은 떠남의 강입니다. 버리고 떠나야 할 삶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친척, 부모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땅으로 강을 건넌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요의 땅, 그러나 우상과 향락과 잘못된 문화를 버리고 약속의 땅으로 떠나기 위해 강을 건너고 홍해 바다를 건너야 했던 것처럼, 우리들은 이곳의 것을 버리고 강을 건너가서 다른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버리지 않으면 떠날 수 없고, 떠나지 않으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세상의 우상을 버리고, 물질주의와 황금만능주의를 버리고, 하나님 없는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떠남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세상의 묵은 때를 벗겨 버리고, 세상 풍속에 물든 낡은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썩어져 가는 옛 습관들을 버려야 합니다.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장 22-24절 말씀입니다. 새 사람을 입기 위해 옛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면서 광야생활이 어렵고 힘들 때 마다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고, 이집트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버리지 못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은 뒤 돌아 보지 말아야 합니다. 버릴 것을 버려야 합니다. 새 삶을 위해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새 집에 이사할 때에 낡은 짐, 새 집에 어울리지 않는 짐을 버려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처럼, 과거의 죄악 된 삶을 버리고 새 피조물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새로운 삶에는 당연히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과거에 죄의 종으로 살던 때의 모습 그대로, 과거에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때의 가치관 그대로, 과거에 인생의 목적도 없고, 소망도 없고, 영생에 대한 확신도 없이 살던 때의 삶의 방법 그대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강을 건넜으면 약속의 땅을 향해 가면서 그 약속의 땅에 맞는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첫 번째 강을 건넌다는 것은 과거를 떠나는 것입니다. 버릴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출신 탐험가 콜럼버스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을 때, 제일 처음 도착한 곳이 산토도밍고입니다. 콜럼버스는 신기한 나무와 꽃들을 살피다가 지지배배 지저귀면서 휙 날아가는 새를 보았답니다. 그것을 본 그는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새로운 땅에 발을 딛다. 여기 종달새는 스페인의 어떤 종달새보다 아름답게 지저귄다.” 그런데 사실 산토도밍고에는 종달새나 그 비슷한 종류의 새도 없다고 합니다. 콜럼버스가 아는 새는 종달새가 전부니 새는 다 종달새일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구대륙 스페인의 의식으로 신대륙 산토도밍고를 바라보니 새로운 새가 날아다녀도 그걸 알아볼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알아볼 눈이 없으면 새로운 것도 새롭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움을 보려면 우리가 먼저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눈이 바뀌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보이지도 깨달아지지도 경험되지도 않습니다. 강을 건너기 전 세계의 지식과 경험과 가치관과 관점으로 바라보니 새로운 것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할 수가 없습니다. 콜럼버스처럼 모든 새가 다 종달새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로마서 12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교우 여러분, 하나님 없이 살던 삶에서 하나님을 믿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되어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본문 말씀 앞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에 이르게 하셨고, 가나안 땅에 사는 족속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40년의 광야 생활을 거치고 요단강을 건넌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흔히들 인생의 삶을 강 이편의 삶과 강 저편의 삶으로 나누어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사람이 죽으면 다섯 개의 강을 건너 하데스에 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로 비통의 강 아케론(Acheron)이라는 강을 건너고, 두 번째로 시름의 강 코퀴토스(Cocytos) 강을 지나갑니다. 세 번째로 불길의 강 플레게톤(Phlegethon)을 건넙니다. 네 번째로 망각의 강 레테(Lethe)강을 건넙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증오의 강 스튁스(Styx)강을 지나 하데스에 이르게 된다고 표현했습니다. 죽음을 ‘강을 건너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 인생에 비유할 때,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약속의 나라인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살다가 가나안 땅 같은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래서 찬송 중에 장례 때 부르는 찬송, 소망에 관한 찬송 가사를 보면, “요단강 가에 섰는데 내 친구 건너가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고 부릅니다.
  우리 모두는 요단강을 건너갑니다. 청년도, 노인도, 누구나 어떤 사람도 예외없이 요단강을 건너가야만 합니다. 언제 누가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절대적 주권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히브리서 9장 27절에 말씀합니다. 죄를 위해 종노릇 한 결과 죄가 우리에게 죽음을 보상으로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는 동안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만나게 됩니다. 질병과 갈등과 외로움과 이별과 형언할 수 없는 아픔들이 죽음의 그림자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람은 살아있으나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친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 요단강을 건널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죽음을 멀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 장례식장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고, 교회를 새롭게 건축하여 교회 안에 장례식장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싫어하는 교인들도 제법 많다고 합니다. 어떤 교회는 장례식장을 만들었는데, 얼마 동안 하다가 없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장례식장 쪽으로 가는 것이 기분이 나쁘고, 또 불편하고 해서 없애 버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말기 암 환자의 40% 이상이 자기가 마지막 인생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통보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다고 합니다. 의사로부터, 가족들로부터 “당신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환자를 생각해서, 그 환자가 이 얘기를 들으면 절망해서 삶에 대한 애착을 포기해 버릴 것 같아서, 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말을 안 해 준다고 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자기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좀 더 건강했을 때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을 갈 수도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과 용서도 하고 화해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고칠 수 없는 질병을 치료한다는 핑계로 그런 기회를 박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고, 준비가 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강을 건너는 인생입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강을 건너가야 하는 인생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평강을 빼앗아 갑니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 우울 그리고 허무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로 우리들에게 산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두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요단강을 건너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는 사람과 세상 신을 떠나지 못해 요단강을 건너기는 하되 심판의 부활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주신 영생을 얻었습니까?
교우 여러분, 구원과 영생의 부활을 위해 요단강을 건너는 믿음의 사람, 소망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유프라테스강을 건너갔다가 다시 건너왔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나라를 이루며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에게 마음이 빼앗기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게 되자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되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포로들이 유프라테스강을 건넜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다가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 의해 포로 귀환이 시작되어 다시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세 번째 종류의 강 건너는 사건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다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겪게 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그리고 다시 강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온 사건은 징계 받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나온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을 믿다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삶을 의미합니다. 다시 죄의 종으로 끌려갔다가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삶을 의미합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세 번째 강은 결단코 건너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일강을 떠나고 홍해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자비로 우리를 다시 용서하시고 회복되는 은혜를 베푸시지만, 우리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과 멀어지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유혹에 휩쓸려 뒤돌아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요단강을 건너 그곳을 정복하고 약속이 이루어진 땅에서 살아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가 물었습니다. 다시 건너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그곳의 신들을 섬길 것이냐?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라도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이 여러분의 대답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결심이 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성경을 통해서 보면서 우리들의 인생이 강 건너는 삶인 것을 깨닫습니다. 여러분, 죄악의 삶, 세상 신을 섬기던 삶을 떠나 날마다 변화되고 성숙되는 성도로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2년 07월 08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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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영적 다이어트
· 일시  2012년 07월 22일
· 말씀  디모데전서 6장 3-1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잃어버린 우산
· 일시  2012년 07월 02일
· 말씀  디모데후서 3장 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지름길은 없습니다.
· 일시  2012년 07월 15일
· 말씀  누가복음 12장 35-4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강을 건너는 삶
· 일시  2012년 07월 08일
· 말씀  여호수아 24장 14-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안디옥 교회처럼
· 일시  2012년 07월 01일
· 말씀  사도행전 13장 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광야의 은혜
· 일시  2012년 06월 24일
· 말씀  신명기 8장 2~6절
· 설교  장시옥 목사
   
주일예배 설교
 깨달음의 은혜
· 일시  2012년 06월 17일
· 말씀  마태복음 13장 10-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깨어짐의 은혜
· 일시  2012년 06월 10일
· 말씀  출애굽기 3장 1~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퀴즈 인생
· 일시  2012년 06월 03일
· 말씀  요한복음 3장 1-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오직 성령으로
· 일시  2012년 05월 27일
· 말씀  스라랴 4장 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영원한 청년
· 일시  2012년 05월 20일
· 말씀  여호수아 14장 6-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큰 복음에 올인하라 !
· 일시  2012년 05월 13일
· 말씀  마태복음 13장 44~46절
· 설교  정지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가정의 회복
· 일시  2012년 05월 06일
· 말씀  에베소서 5장 31-6장 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 일시  2012년 04월 29일
· 말씀  에베소서 6장 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숯불 위의 생선과 떡
· 일시  2012년 04월 22일
· 말씀  요한복음 21장 1-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