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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가장 큰 차이  [5526]
· 설교 일자 : 2013년 03월 10일
· 본문 말씀 : 요한복음 3장 13~18절
· 설교 :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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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가장 큰 차이 (요한복음 3장 13~18절)
  요즘 중국의 제품들이 세계 시장의 판도를 바꾸려고 놀랍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것은 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의 제품은 세계 시장에서 단지 값싼 물건들로만 여겼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물건을 싼 맛에 구입하여 사용해 본 사람들이 ‘중국 물건은 역시 품질이 무척 떨어져서 기존 물건들과 차이가 나!’ 그래서 중국의 영어 나라이름이 ‘차이나’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중국산 품질이 상당히 좋아져 차이가 점점 좁혀지고 있어서 이제는 중국의 영어 이름을 ‘차이나’에서 ‘차이쫌나’로 바꿔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구별 짓고 차이가 나게 할까요? 어떤 차이가 사람을 행복과 불행으로 나뉘게 할까요? 어떤 차이가 인생의 심각한 문제가 될까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일까요? 많이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의 차이일까요? 잘 생긴 사람과 못 생긴 사람의 차이일까요? 남자와 여자의 차이일까요?
  얼마 전 80세가 가까운 분이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그분이 말한 표현대로 말해보겠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늙으면, 돈 많은 놈이나 가난한 놈이나, 많이 배운 놈이나 못 배운 놈이나, 잘 생긴 놈이나 못 생긴 놈이 다 거가 거긴 기라!” 결국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이가 들면 평준화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지식의 평준화, 외모의 평준화, 부의 평준화, 건강의 평준화가 이루어지다가 80이 넘으면 목숨의 평준화까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죽은 뒤에 옷 한 벌 걸쳐 입고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똑같습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인생은 차이가 없는 것으로 결국 끝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과 멸망의 차이입니다. 가장 큰 차이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인생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밤에 찾아와서 질문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하나님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는 과정에서 본문 13, 14, 15절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라는 말씀은 이런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 길을 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물이 없을 때에 반석을 쳐 물을 내 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시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 길이 길어지자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 가득하였습니다. 자신들을 광야에서 죽게 한다고, 광야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고, 만나와 메추라기는 하찮은 음식이라고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의 반역적인 태도를 벌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뱀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불뱀에 물린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자신들이 하나님과 모세에게 범죄하였으니 하나님께 기도하여 불뱀을 떠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에 모세가 하나님께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높이 매달아라. 그리고 뱀에게 물린 자가 장대위의 놋뱀을 쳐다보면 살 것이라고 말하라.” 모세는 그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높이 달린 놋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살아났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나무위에 달려 죽으실 것이고, 나무위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리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만나실 때쯤에는 본격적으로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실 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라는 단어를 말씀하지 않았지만, 결국 십자가에 자신이 달리실 것과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본 사람은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면 치료해 주시고 살려주실 것을 믿는 사람이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지 못해 바라보지 않은 사람은 뱀의 독이 온 몸에 퍼져 죽어갔습니다. 이 차이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차이입니다. 이 차이를 아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사람들을 가장 큰 차이가 나게 합니다. 십자가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라는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천국 사이의 경계선이 됩니다. 십자가 때문에 가장 큰 차이가 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 다른 종교와 가장 큰 차이를 보여줍니다.
다른 종교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 자신이 선을 쌓고, 수행을 하고, 공덕을 쌓고, 인격수양을 통해 그 종교가 말하는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을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 스스로 죄와 저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시는 구원의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십자가의 도는 도무지 정복되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어느 종교도 감히 비길 수조차 없는 유일하고 독특한 구원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진리는 이 세상의 다른 종교와 가장 큰 차이가 나는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납니다. 이 차이는 십자가를 믿는 사람과 믿지 못하는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그 차이는 영생을 얻느냐, 멸망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십자가 앞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명의 죄수들입니다. 두 죄수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전혀 다른 길을 갔습니다. 한 죄수는 십자가위의 예수님을 조롱하고 저주하며 죽었고, 한 죄수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회개하고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청했고, 예수님께로부터 그는 구원을 허락받았습니다. 멸망과 영생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은 다른 것은 결국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가장 크고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멸망하느냐? 입니다. 생명을 향한 삶이냐? 죽음을 향한 삶이냐?의 차이입니다.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느냐?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느냐? 이 세상에서 우리들은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며 살고 있습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가 쓴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라는 책에는 부스 가문의 세 형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드윈 토마스 부스, 존 윌크스 부스, 주니어스 부스입니다. 1863년, 이들이 함께 [줄리어스 시이저] 연극을 공연했습니다. 그 연극에서 시이저를 죽이는 암살범 부루투스 역을 맡았던 존 윌크스 부스는 2년 후, 4월 ‘포드의 극장’에서 관람석 뒤쪽 칸막이 처진 곳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 에이브러햄 링컨의 머리에 총을 쏘았습니다. 미국인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링컨 대통령을 암살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그의 형제 에드윈 토마스 부스는 형제의 범행이 부끄러워 무대를 떠났습니다. 그 후 그가 뉴저지의 한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 옷을 잘 차려 입은 한 젊은이가 무리에 떠밀려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승강장과 움직이는 기차 사이로 떨어졌습니다. 에드윈 토마스 부스는 즉각 선로에 한발을 내려놓고 그 사람을 붙잡아 끌어올려 살려 냈습니다. 살아난 젊은이는 자기를 구해 준 사람이 유명했던 연극배우  에드윈 토마스 부스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에드윈 부스는 그 젊은이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편지 한통을 받고나서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구한 젊은이가 자기 형제가 암살한 에이브러햄 링컨의 아들 로버트 토드 링컨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링컨을 죽인 존 부스도, 링컨의 아들을 살린 에드윈 부스도 같은 아버지, 같은 어머니의 아들들입니다. 그들의 직업 연극배우도 같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죽음을 선택하고, 한 사람은 삶을 선택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도 부모가 같은 형제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을 선택하였고, 가인은 살인을 선택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과 당시 사람들은 함께 홍수 심판을 맞게 되었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방주에 들어가 살았고, 다른 사람들은 죄에 휩쓸려 살다가 홍수에 휩쓸려 죽음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함께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왔지만, 롯은 소돔 땅을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하여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땅으로 갔습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 성에 유황불 심판이 임하게 되어 롯은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12명의 정탐꾼은 같은 곳을 보고 왔지만 10명은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의 보고를 했고, 2명의 정탐꾼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의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10명의 정탐꾼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다윗과 사울은 둘 다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선택하였지만 사울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권력을 선택하여 불행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 나뉘어졌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둘 다 같은 스승의 제자였습니다. 둘 다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용서를 받고 회복이 되어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울과 랍비 가말리엘의 제자들은 당대의 최고의 스승인 가말리엘 밑에서 같이 율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다른 가말리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믿지 않고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사도가 되어 이름을 바울이라고 바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헌신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십자가의 진리로 구원을 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차이가 얼마나 크고 다른 지를 말씀합니다.  
  교우 여러분, 십자가를 통하여 이 세상의 가장 큰 차이인 영생과 멸망 중 영생을 얻었습니까? 영생을 얻은 가장 큰 차이를 감사, 감격하며 살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통하여 십자가의 진리와 능력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십자가의 진리와 능력을 누리는 사람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잘못 받아들이면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결과를 맞습니다. 며칠 전 모 방송국에서 경기도 폐건물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42세 김 종석씨에 대한 사건을 취재하여 보도했습니다. 지난 해 문경에서도 그와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십자가 위에 양 팔을 벌리고 양 손에 못이 박혀 있고, 발에도 못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일까요? 누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죽은 것일까요? 국과수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자살로 판정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스스로 자신의 양 손에 못을 박고 발에도 못을 박을 수 있을까요? 먼저 십자가에 못을 박아 놓고 그 다음 스스로 손과 발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맞추듯 하면 가능하다는 전문가의 의견이었습니다. 그 방송에서 여러 가지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그가 가진 신앙은 사이비 종교 영생열쇠교였습니다. 영생열쇠교는 교주 이숙영을 ‘천미아’라고 부르며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이비 종교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있었지만, 그것은 우리 기독교의 십자가의 도가 아니었습니다. 방송 보도에 의해 드러난 실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영생열쇠교는 신도들이 돈을 많이 내면 천국에 들어가 영생할 수 있는 열쇠를 받습니다. 화면에 보니까 열쇠 모양은 금은방에서 만들어 파는 금 열쇠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도들은 그것을 받아 들고 너무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열쇠를 문질러 보니 금으로 도금한 저급한 열쇠였습니다. 1억씩 헌금을 내고 받은 영생열쇠가 그렇습니다. 전국에 영생열쇠교 신도들이 약 2천 여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은 김 종석씨는 왜 죽었느냐고 하면, 자신이 스스로 순교하기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순교하면, 영생열쇠를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돈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열쇠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면 영생열쇠가 하늘로부터 주어진다는 교리는 도대체 성경 어디에 있는 교리입니까?
  그들은 왜 그렇게도 무지 목매한 맹신자가 되었을까요? 왜 그리 어리석을까요? 그들 가운데는 교수도 있고, 사장도 있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군요. 왜 그렇게 사리분별을 못하게 되었을까요?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진리,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의 신앙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알맹이 없는 껍질뿐인 십자가를 신봉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금은방에서 만든 영생열쇠를 주시려고 죽으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십자가가 부적처럼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 복음의 진리가 빠지면 미신이 되고, 사이비가 되고, 병든 신앙이 됩니다. 십자가의 겉모양 흉내를 낸다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형틀만 세운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강단 정면에 왜 십자가가 없느냐고 궁금해 하는 분이 있습니다. 2003년 교회 리모델링을 하면서 강단 정면에 십자가를 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강단 정면 벽의 구조가 무거운 십자가를 달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조잡하게 십자가를 달수도 없고, 그리고 스크린이 내려와 있으니 달아도 십자가를 가립니다. 종교 개혁주의자들은 ‘교회는 하얀 벽에 성경만 있으면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한때 한국의 정통보수교회에서는 십자가를 강대상에 거는 것을 금기시 했습니다. 성경은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십자가 형상을 만들어 강단에다가 거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그렇다고 십자가를 거는 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까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십자가를 십자가의 진리,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묵상하는 상징으로 바라보지 않고, 십자가 형태 자체에 집착을 하고, 십자가 모양이 없으면 무슨 복음적인 신앙에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으로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부러 십자가를 없애려고 할 필요도 없지만 십자가의 형상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단지 보이는 십자가가 아니라 깨닫는 십자가, 십자가의 진리를 듣는 십자가이어야 합니다. 복음이 담겨진 십자가이어야 합니다.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본 사람은 많았습니다. 십자가를 본 사람은 많았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보았다고 다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 후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를 듣고 깨닫고 믿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고, 그들이 교회를 이루고, 그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한 것은 십자가 형태의 나무를 자랑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극악무도한 죄수를 처형하는 형틀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자랑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는 말씀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과 십자가의 능력만을 믿고 의지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 십자가 형태의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십자가 나무 자체에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기독교의 상징으로 보는 것은 십자가 형태가 특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신 대속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중요성은 믿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상에 있습니다. 다시 설명하면, 내가 믿기 때문에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대상, 즉 내가 믿는 예수님, 내가 믿는 하나님에게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무리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이 능력이 있어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그렇게 하라고 하시고, 쳐다보면 나을 줄 믿고 바라보는 사람을 치료하시는 하나님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도 그렇습니다. 십자가 나무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위의 예수님의 용서 때문에, 십자가위의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십자가위의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십자가위의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십자가위의 예수님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십자가 신앙입니다.  
  북한을 탈출한 과정에서 깨닫게 된 것을 간증한 한 탈북 여성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은 아버지와 함께 탈북을 해서 배를 탔는데 배에서 갑자기 아버지가 무릎 꿇고 기도하고 찬송가를 10절까지 큰 소리로 부르고, 성경 말씀을 딸딸 외우면서, 하나님께 울면서 감사기도를 하더랍니다. 순간 그 딸은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내가 이런 반동하고 그동안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감쪽같이 딸도 속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딸의 마음에는 동시에 “공산주의는 망하겠구나. 그렇게 공산주의 교육을 시켰는데도 몰래 성경을 저렇게 딸딸 외우고, 10절까지 있는 찬송을 부르고, 감사 기도를 드리며 예수를 믿는 것을 보니 결국 공산주의는 망하게 될 것이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기독교 신앙을 공산주의가 이기지 못하고, 없애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십자가 신앙 때문입니다. 북한에 있는 지하교회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신앙이 가슴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영생을 얻었고,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십자가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 바라보도, 예수님만 바라보고 사는 십자가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환난과 핍박 중에도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신앙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신앙이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신앙은 쉽게 무너집니다. 쉽게 넘어갑니다. 쉽게 변질됩니다. 쉽게 배교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 신앙이 없다면, 그것은 단순한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아도 덤덤하다면 신앙이 메말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그 신앙이 무너질지 모릅니다. 십자가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십자가의 진리와 능력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 앞에 서십시오. 나무 십자가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 서십시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어떤 고통과 고난을 당하셨는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루어주신 것이 무엇인지, 나는 그 십자가 앞에서 무엇을 느끼고 깨닫고 결단해야 하는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장 24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예수님은 나를 위해 모함과 조롱과 비웃음과 핍박과 억울함과 수치와 고통과 버림을 받으셨는데, 나는 주님 때문에 당하는 것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십자가 없는 영광의 신앙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는가? 십자가 신앙과 상관없이 그저 건강하고 평안하고 형통하기만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슴에 세우십시오. 우리의 가슴 속에서 멀어지고 사라진 십자가를 다시 세우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묵은 땅을 갈아엎는 쟁기와도 같습니다. 우리의 딱딱해진 마음의 땅을 깨뜨려 뒤집는 곡괭이와도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돌들을 캐어내는 괭이와도 같습니다. 십자가를 가슴에 부둥켜안으면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순절을 지나고 있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세상과 가장 큰 차이가 납니다.
  저를 포함하여 나이가 적든 많든, 신앙생활을 오래 했든 적게 했든, 중직자이든 아니든 모든 교우들은 십자가 신앙을 새롭게 가져야 합니다. 보이는 십자가 신앙이 아니라 가슴에 새겨진 십자가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3년 03월 10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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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거짓이 없는 믿음
· 일시  2013년 05월 26일
· 말씀  디모데후서 1장 3~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각 사람위에 임하신 성령님
· 일시  2013년 05월 19일
· 말씀  사도행전 2장 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예수님이 계신 가정
· 일시  2013년 05월 12일
· 말씀  에베소서 6장 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어린 아이와 같이
· 일시  2013년 05월 05일
· 말씀  마태복음 18장 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 일시  2013년 04월 28일
· 말씀  신명기 30장 19~20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불쌍히 여기사
· 일시  2013년 04월 21일
· 말씀  누가복음 7장 11-17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위대한 명령, 최고의 사명
· 일시  2013년 04월 14일
· 말씀  마태복음 28장 18-2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부활의 기쁨
· 일시  2013년 03월 31일
· 말씀  베드로전서 1장 3-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시험에 들지 않게
· 일시  2013년 03월 24일
· 말씀  마태복음 26장 36-4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십자가의 능력으로
· 일시  2013년 03월 17일
· 말씀  고린도후서 13장 4~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십자가, 가장 큰 차이
· 일시  2013년 03월 10일
· 말씀  요한복음 3장 13~1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묵은 땅을 기경하라
· 일시  2013년 03월 03일
· 말씀  호세아 10장 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다리 놓는 사람
· 일시  2013년 02월 24일
· 말씀  베드로전서 2장 9-1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문제 뒤에 있는 하나님의 뜻
· 일시  2013년 02월 17일
· 말씀  요한복음 6장 1-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마른 떡 한 조각
· 일시  2013년 02월 10일
· 말씀  잠언 17장 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 일시  2013년 02월 03일
· 말씀  창세기 16장 1~14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하여
· 일시  2013년 01월 27일
· 말씀  창세기 13장 1~13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다음 세대를 위하여
· 일시  2013년 01월 20일
· 말씀  요한삼서 1장 2~4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작은 자에게, 작은 것 부터 (II)
· 일시  2013년 01월 13일
· 말씀  열왕기하 5장 1-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작은 자에게, 작은 것 부터 (I)
· 일시  2013년 01월 06일
· 말씀  마태복음 25장 31~46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위의 것을 찾으십시오
· 일시  2012년 12월 31일
· 말씀  골로새서 3장 1~3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균형을 잡는 신앙
· 일시  2012년 12월 30일
· 말씀  전도서 7장 15~1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은혜를 받은 자여
· 일시  2012년 12월 23일
· 말씀  누가복음 1장 26-3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양날 칼 같은 하나님의 말씀
· 일시  2012년 12월 09일
· 말씀  히브리서 4장 12-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언약의 사자
· 일시  2012년 12월 02일
· 말씀  말라기 3장 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