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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도 우셨습니다  [3653]
· 설교 일자 : 2012년 09월 09일
· 본문 말씀 : 요한복음 11장 31~35절
· 설교 :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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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1~35절)
  1986년에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주(州) 수도인 세마랑에서는 누가 가장 그럴듯하게 우는지를 가려내는 기묘한 전국울음대회가 열렸었습니다. 이 대회에 참가한 27명의 선수들은 실연의 울음을 선보이는가 하면, 신세를 한탄하는 울음, 고통을 참지 못하는 울음, 공포에 질린 울음, 부모를 잃고 서러워하는 울음 등 각종 울음을 선보였습니다. 그 중 어머니를 여의고 난 뒤 우는 모습을 보인 선수가 우승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글쎄요. 어떤 눈물을 흘리며 울었길 래 우승을 했을까요?
  이어령 박사의 눈물에 대한 글에는, 눈물은 인간만이 누리는 특권이라고 말합니다. 짐승들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것 같이 보일 때도 있지만 그것은 본능적이고 생리적인 눈물이라고 말합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들이 눈물을 흘린다든지, 악어의 눈물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짐승의 눈물은 눈의 불순물을 씻어내기 위해, 체내에서 내보내는 분비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도 그런 생리적 눈물을 흘립니다. 양파를 깔 때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경우 말입니다. 윌리엄 프레이라는 생화학자는 감정의 눈물은 이런 생리적 눈물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연구 발표를 했습니다. 양파를 깔 때나 마늘이 매워서 흘리는 생리적 눈물보다 감정이 섞인 눈물에는 그만큼 단백질이 더 많이 검출된다고 합니다. 분해서 우는 눈물에는 나트륨 성분이 많이 섞여서 나오기 때문에 맛이 더 짜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뻐서 나오는 눈물, 즉 승리하고서 시상대에 흘리는 눈물에는 칼륨이 많이 섞여서 맹물에 가까운 밋밋한 맛이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감정과 흘리는 눈물과의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감정적인 눈물을 흘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남자는 살아가면서 세 번 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 번만 울 수 있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세 번의 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울고,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울고, 나라가 망했을 때, 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그나마 울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으로 줄어드는 것입니까? 남자 여러분,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오면서 딱 세 번만 울었습니까? 남자가 세 번 이상 울면 그의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 됩니까? 여자는 자주 울어도 괜찮고, 남자는 그렇게 울음을 억제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가수 조항조씨가 부른 [남자라는 이유로]라는 가요의 가사를 보면, “누구나 웃으면서 세상을 살면서도 / 말 못할 사연 숨기고 살아도 / 나 역시 그런저런 슬픔을 간직하고 / 당신 앞에 멍하니 서있네 / 언제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 내어 / 소리 내어 울어 볼 날이 /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하는 남자의 가슴을 노래한 것 같습니다. 눈물을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사람이 눈물을 흘릴 때 몸속의 독소가 같이 빠져나오기도 한다는데,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평균수명이 짧은 것은 울지 못해서 독소가 빠져나오지 못해 빨리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말은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눈물에 우는 사람의 마음이 담길 때, 눈물은 의미가 있고, 메시지가 전달되고, 강한 힘이 있습니다.
  일본 전국 시대 때의 사람으로 도꾸가와 이에야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 오다이라는 여인은 참으로 훌륭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운명적인 여인이었습니다. 이 성주, 저 성주에게 팔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인질로 잡혀가서 오다 노부나가란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몰래 오다 노부나가란 사람을 찾아가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아들의 생사를 좌우할 오다 노부나가는 “내가 당신의 아들을 살려 준다면 그 대가로 나에게 무엇을 바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가장 값진 것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황금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인질로 보낸 그 어머니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내가 바칠 것을 이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당신도 어머니가 있습니다. 제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어머니의 눈물을 바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다 노부나가는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살려 주었습니다. 이 여인이 가진 것은 눈물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눈물이었습니다. 아름답고 고귀한 어머니의 눈물입니다.
  지난 9월 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505호 법정에 선 피고인은 지난해 3월, 전교 1등을 하라고 혼내며 밥을 굶긴 채 골프채로 밤새도록 200대를 때린 어머니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지 아무개(19)군이었습니다. ‘존속살해’라는 무거운 죄를 저지른 지군을 엄히 꾸짖을 법도 했지만, 판결문을 읽어 내리는 형사10부 조 경란(52세) 부장판사의 목소리가 점점 더 떨렸습니다. ‘어미의 심정’으로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조 부장판사는 “지군이 어머니를 살해한 것은 정당방위에 해당한다.”는 변호인의 주장과 “지군은 어머니를 살해할 당시 심신미약 상태가 아니었다.”는 검사의 주장을 모두 배척하는 판결문 내용을 담담하게 읽어가다, 별도로 준비한 양형 이유 대목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조 부장판사는 “지군의 행위는 자신의 존재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지군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임을 인정하고 있고, 지군이 올바른 심성으로 아름답게 성장할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어, 지군을 실형에 처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며 법관으로서 고뇌를 밝혔습니다. 그는 이어 자신을 피고인과 같은 사춘기 자녀를 둔 어미로서 지군 부자의 죄책감과 고통을 가슴 깊이 공감하고 이해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형벌은 지군 한 사람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지군으로서도 일정 기간 가장 낮은 곳에서 섬김과 봉사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속죄의 시간을 갖는 것이 오히려 유익하다고 생각 된다.”고 징역형 선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지군에게는 1심과 같은 징역 단기 3년, 장기 3년6월이 선고됐습니다. 조 부장 판사는 “비록 피고인을 아버지 품으로 바로 돌려보내지는 못하지만, 어미의 심정으로 피고인의 장래를 위해 기도할 것을 약속하며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 부장판사는 피고인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안경 아래로 흐르는 눈물을 여러 차례 훔쳐냈습니다. 조 부장판사의 눈물에 방청석에서도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재판이 끝난 뒤 지군의 아버지는 기자들과 만나 “(재판부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판결을 내려줘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여 판사의 어미의 심정으로 판결을 하며 흘린 눈물이 죄를 벌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기성세대의 잘못을 통감하며 우리 사회가 회개하며 흘려야 하는 눈물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의 눈물은 눈물 그 이상의 의미와 힘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닭이 울자 베드로는 통곡을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요, 통회하는 눈물입니다. 그 통회의 눈물이 있었기 때문에 훗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회복시키시어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여 은 30에 팔아버린 가룟 유다는 나중에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후회를 했지만, 통회하며 회개하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할 때 눈물이 흐릅니다.
  교우 여러분, 회개하며 흘리는 눈물은 부끄러운 눈물이 아니라 거룩한 눈물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리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는 헌신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눈물 속에 예수님에 대한 사랑, 예수님에 대한 감사, 예수님에 대한 헌신이 담겨있었습니다. 눈물과 함께 사랑의 마음이 표현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 울어 보셨습니까? 어떤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복음서와 신약성서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중 세 번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나라 남자들에게 적용하는 세 번 울어야 한다는 말을 아시고 세 번만 우셨던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때에 우셨는지, 그리고 그 때 흘리신 눈물의 의미를 깨달아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이 풍성해지고 온전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첫 번째 기록은 오늘 본문 말씀 31-35절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죽은 나사로의 집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눈물을 흘리시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의 말씀, 1절부터 44절까지의 중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베다니라는 동네에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삼남매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우 가까이 지내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친구라고 했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에서부터 하루가 걸리는 거리에 계셨습니다. 아마도 요단 건너편 베뢰아에서 전도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베다니에서 사람들이 와서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고 전했고, 예수님은 곧 바로 베다니로 가시지 않고 이틀을 그곳에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베다니로 오셨습니다. 그 때가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따뜻한 기후 때문에 죽은 당일 날 해가 저물기 전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전한 사람들이 베다니를 떠나자마자 나사로는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이후에야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셨습니다. 그래야 날짜 계산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출발하셨어도 이미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막으려고 때맞춰 도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가 장사 지내고 무덤에 있을 때에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맞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예수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자기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원망하듯 하면서 우는 것을 보셨고, 그리고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하게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슬퍼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물을 보시고, 이런 슬픔을 가져다 준 죽음이라는 권세에 대해 비통하게 여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불러온 죄의 세력에 대해서도 비통하게 여기셨습니다. 죽음이 원수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부모님의 죽음 등 많은 죽음을 겪고 목격하였지만 기억나는 죽음은 대학 때부터 함께 공부했고, 기숙사에서 함께 어울리며 지냈던 친구 신영국 목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입니다. 결혼한 지 3달 밖에 안 됐고, 신대원을 졸업하고 군목인지라 곧 바로 목사 안수를 받고 곧 군목으로 복무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친구였습니다. 그 장례 때, 갓 결혼한 신혼의 신부가 운구하는 신랑의 관을 붙잡고 가면서 “신랑아! 신랑아! 나 어떻게 살라고!”하면서 따라가는 데, 친구의 죽음도 슬프지만, 친구의 아내의 절규는 더더욱 슬픔의 눈물을 쏟아내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슬픔을 가져다 준 죽음의 권세가 미웠습니다. 여러분, 죽음의 힘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죽음의 힘이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죽음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죽음의 권세와 죄의 권세를 멸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 속에서 비통하게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35절에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씀에 사용된 단어는 그냥 눈물을 흘렸다는 뜻이 아니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죽음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슬픔과 절망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마저도 눈물 없이는 그것을 지켜 볼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에 슬피 우는 자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말씀처럼,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은 우리가 느끼는 연약함, 즉 슬픔, 고통, 괴로움 등을 못 느끼시고, 함께 하시지 못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슬픔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우는 자와 함께 우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능력은, 인간적인 고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해결해 주는 그런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죽음과 비탄의 감정에 전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것도 낯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느끼는 어떤 것도 생소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기쁨, 우리의 슬픔, 우리의 아픔, 우리의 괴로움, 우리의 낙심, 우리의 절망을 주님은 다 아시고, 함께 느끼셨고,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은 단순한 슬픔의 눈물이 아닙니다. 눈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슬픔을 함께 하던 유대인들과 함께 슬픔을 나눌 뿐만 아니라 슬픔을 넘어서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 사건은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서 흐르는 눈물은 슬픔을 넘어서기 위해서 하늘을 바라보는 눈물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사건입니다. “눈물은 인간이 먼 천국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망원경이다.” 헨리 워드 비처 목사가 말했습니다. 눈물을 통해 영원한 기쁨, 영원한 생명을 갈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전주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님은, 어린 시절 인생의 전부였던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단 한마디의 유언도 없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그는 단장의 슬픔이 무엇인지를 알았다고 합니다. 장이 끊어지는 듯한 슬픔을 말합니다. 얼마나 슬펐든지 1년 365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통곡하며 죽은 것처럼 살았습니다. 특히 다섯 살짜리 어린 여동생이 “엄마, 보고 싶어! 오빠! 엄마 보고 싶어!” 하며 울부짖을 때에는 가슴을 치며 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슬픔이 슬픔으로만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분에게 눈물의 프리즘을 통해서 하늘의 영원한 세계를 보여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슬픔 때문에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은혜를 받게 되었고,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주 깊이 깨닫게 하셨고, 슬픔의 눈물 속에서 오직 주님의 위로만이 진정하고 영원한 위로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늘과 하나님은 눈물을 통해서만 가장 잘 볼 수 있다. 필경 그 눈물 없이는 전혀 식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사별의 시간과 죽음의 장면에 끊임없는 기도의 교제 때 하늘과 하나님이 나타나기에 충분할 것이다.” 영국 교회의 목사 제임스 마티뉴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슬픔은 슬픈 일이지만 슬픔을 통해 슬픔이 없는 세상을 그리워하게 되고, 이 세상에서의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과 슬픔이 영원히 사라질 천국을 소망하게 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누가복음 19장 41절 이하에 보면,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산위에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 인데, 그것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난 후, 이스라엘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주후 70년에 로마가 대대적인 이스라엘 점령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짖 밟았습니다. 예루살렘을 공략했을 그때, 칼에 죽은 사람이 1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처럼 부모와 자녀들이 로마의 칼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이루어질 예루살렘의 운명을 아셨고,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당시 지도자들은 민족의 앞날은 뒤로 하고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되었고,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이리저리 쓸려 다닙니다. 소망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힘겨워 신음을 내고 있습니다.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며 울어야 할 사람들이 울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보시는 예수님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셨고, 슬픔으로 우셨습니다.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며 불쌍한 민족을 위해 우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 슬픔, 내 가족의 슬픔에는 쉽게 눈물을 흘리면서 이웃의 슬픔, 민족의 슬픔, 다른 나라의 슬픔에는 눈물이 말라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을 때는 엉엉 울면서, 밥도 먹지 않고 슬퍼하면서 북한에서, 아프리카에서, 저개발국가 가난한 나라에서 굶어죽는 어린이들과 사람들이 많다는 소식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지는 않는가요? 교우 여러분, 우리의 눈물의 차원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민족의 앞날을 바라보며, 나라의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며,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슴 아픈 사건들, 고통의 현장, 어둠의 권세가 조장하는 인간성의 파괴,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사람들과 죄악들을 보면서 탄식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고민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들에게 잡히시고 고난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할 수만 있다면 이 고난의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고,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우신 기록입니다. 인간으로써의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써 그 고난의 잔을 마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 두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눈물은 가슴이 터질 듯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눈물이었고, 하나님께서 그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고, 능히 십자가의 잔을 마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눈물은 인류의 죄 때문에 그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참 하나님이시오, 참 인간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울음입니다. 인간 구원을 향한 온 인류를 위한 울음입니다. 그 눈물의 기도를 통하여 인류 구원의 역사가 완성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 속에 하나님의 심장에 흐르고 있는 사랑의 깊이를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통하여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몸부림치는 현장에 찾아와 함께 하시며 함께 우시는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울 때 주님도 함께 우시며, 우리가 몸부림칠 때 주님도 몸부림치시며, 우리가 눈물로 절규할 때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신 것처럼 지금도 우리를 위해 절규하심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물 속에서 내 죄 때문에 버림 받으시고, 내 죄 때문에 고통당하시고, 내 죄 때문에 죽임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 가슴 속에도 참회의 눈물이, 고백의 눈물이,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헌신의 눈물이 흘러야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셨고, 눈물을 흘려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눈물 없이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교회 생활을 하면서 슬픈 일이 생기고 눈물이 흐릅니까? 그것이 자신의 잘못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면,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고난 중의 한 종류인 슬픔의 눈물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이 시작되면 항상 기쁨으로 충만하여 웃고만 다닐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분명히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을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슬픔도 겪게 하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랑하는 이를 구원하고,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일도 있게 하십니다. 눈물은 천국으로 이끄는 다리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셨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우셨던 것처럼, 눈물을 흘리는 마음과 눈물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도 한 영혼을 위하여 울고, 이 땅의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울며 부르짖어야 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죄나 연약한 부분을 붙들고 슬퍼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흘리는 눈물은 여러분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이 살아있고, 감정이 살아있고, 양심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은 모질지 않습니다. 완악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기 때문이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고통이 내 고통으로, 그의 슬픔이 내 슬픔으로, 그의 불행이 내 불행으로 느껴지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인 긍휼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로마서 12장 15절에 말씀합니다.
  슬픔과 눈물이 있기에 주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위로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4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주님께서 눈물을 닦을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 말씀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때가 되면, 즉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면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가고, 더 이상 눈물 흘리거나 아프거나 애통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우리들의 삶에 눈물이 있습니다. 눈물 흘릴 일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죽음은 우리들에게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슬픔을 가져다주고, 우리는 그 슬픔 속에서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슬픔이 슬픔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눈물이 눈물로만 이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슬픔을 기쁨으로, 눈물을 웃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주님의 도우심으로, 복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슬픔을 기쁨으로, 눈물을 웃음으로 바꿔나가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천국에 들어가 슬픔과 눈물과 한숨과 아픔을 끝내버리고 영생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우리의 눈물이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슬픔의 눈물에 머물지 않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주님의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2년 09월 09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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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6월 첫째주 수요기도회 설교
· 일시  2013년 06월 05일
· 말씀  (본문을 기재해 주세요)
· 설교  정지환 목사
   
수요예배 설교
 2013년 4월 첫째주 수요기도회 설교
· 일시  2013년 04월 03일
· 말씀  (본문을 기재해 주세요)
· 설교  정지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뿌리 깊은 나무
· 일시  2013년 06월 23일
· 말씀  골로새서 2장 6~7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이 복과 말씀을 주신 교회
· 일시  2013년 06월 16일
· 말씀  창세기 35장 9~15절
· 설교  정연원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컴플렉스
· 일시  2013년 06월 16일
· 말씀  마태복음 25장 14~30절
· 설교  서수관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 일시  2013년 06월 09일
· 말씀  시편 51편 16~19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 일시  2013년 06월 02일
· 말씀  잠언 27장 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거짓이 없는 믿음
· 일시  2013년 05월 26일
· 말씀  디모데후서 1장 3~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각 사람위에 임하신 성령님
· 일시  2013년 05월 19일
· 말씀  사도행전 2장 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예수님이 계신 가정
· 일시  2013년 05월 12일
· 말씀  에베소서 6장 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어린 아이와 같이
· 일시  2013년 05월 05일
· 말씀  마태복음 18장 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 일시  2013년 04월 28일
· 말씀  신명기 30장 19~20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불쌍히 여기사
· 일시  2013년 04월 21일
· 말씀  누가복음 7장 11-17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위대한 명령, 최고의 사명
· 일시  2013년 04월 14일
· 말씀  마태복음 28장 18-2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부활의 기쁨
· 일시  2013년 03월 31일
· 말씀  베드로전서 1장 3-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시험에 들지 않게
· 일시  2013년 03월 24일
· 말씀  마태복음 26장 36-4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십자가의 능력으로
· 일시  2013년 03월 17일
· 말씀  고린도후서 13장 4~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십자가, 가장 큰 차이
· 일시  2013년 03월 10일
· 말씀  요한복음 3장 13~1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묵은 땅을 기경하라
· 일시  2013년 03월 03일
· 말씀  호세아 10장 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다리 놓는 사람
· 일시  2013년 02월 24일
· 말씀  베드로전서 2장 9-1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문제 뒤에 있는 하나님의 뜻
· 일시  2013년 02월 17일
· 말씀  요한복음 6장 1-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마른 떡 한 조각
· 일시  2013년 02월 10일
· 말씀  잠언 17장 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 일시  2013년 02월 03일
· 말씀  창세기 16장 1~14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하여
· 일시  2013년 01월 27일
· 말씀  창세기 13장 1~13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다음 세대를 위하여
· 일시  2013년 01월 20일
· 말씀  요한삼서 1장 2~4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작은 자에게, 작은 것 부터 (II)
· 일시  2013년 01월 13일
· 말씀  열왕기하 5장 1-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작은 자에게, 작은 것 부터 (I)
· 일시  2013년 01월 06일
· 말씀  마태복음 25장 31~46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위의 것을 찾으십시오
· 일시  2012년 12월 31일
· 말씀  골로새서 3장 1~3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균형을 잡는 신앙
· 일시  2012년 12월 30일
· 말씀  전도서 7장 15~1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은혜를 받은 자여
· 일시  2012년 12월 23일
· 말씀  누가복음 1장 26-3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양날 칼 같은 하나님의 말씀
· 일시  2012년 12월 09일
· 말씀  히브리서 4장 12-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언약의 사자
· 일시  2012년 12월 02일
· 말씀  말라기 3장 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