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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5015]
· 설교 일자 : 2013년 06월 09일
· 본문 말씀 : 시편 51편 16~19절
· 설교 :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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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시편 51편 16~19절)
여러분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왜 예배를 드립니까? 무엇 때문에 예배를 드립니까?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까?
  어느 목사님이 교인의 가정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 교인이 심방 온 목사님에게 이렇게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오늘 예배는 좀 쎄게 봐 주십시오!” 목사님은 그렇게 말하는 교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그 말에 웃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도대체 ‘예배를 쎄게 봐 달라’는 말은 어떻게 예배하라는 것인지 기분이 묘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교인의 말 속에는 예배를 통하여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교인의 간절함과 기대감이 담겨 있겠지요.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예배가 무엇인지를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 교인은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 것이 쎄게 드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목사가 목소리를 크게 하고, 열심을 내어 찬송하고, 뭔가 힘을 써서 기도하면 ‘예배를 쎄게 봐주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면, 그것은 예배에 대해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내가 힘쓰고 애쓰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있습니다. 예배의 대상, 즉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예배를 통하여 우리와 교제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바르게 알지 않고서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예배하는 하나님께서 어떤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냐? 예배하는 자의 마음과 자세가 어떠해야 하느냐?를 바르게 알고 예배해야 합니다.
  이런 예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돼지 대가리를 놓고 고사를 드리는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 삶은 돼지 대가리의 코에 만 원짜리 돈을 꽂아 놓은 모습을 어떻게 보십니까? 사람들이 어리석기가 그지없습니다. 돼지 대가리나 좋아하는 신이라면 얼마나 저급하고 웃기는 신인지 생각을 못하느냐 그 말입니다. 또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고 고사를 지냅니다. 열심히 절을 합니다.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 모릅니다. 만약 그런 정성과 열심과 노력으로 하나님께도 똑같이 돼지 대가리를 강단에 올려놓고 만 원짜리를 콧구멍에 꽂아 놓고 절을 하며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실까요? 절대 받으시지 않으시지요.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진노하실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열심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둘째로 그 교인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예배를 관람행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대해 말로 잘못 표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이런 표현입니다. “나 지금 예배 보러 간다.” “예배 보십시다!” “다같이 예배 본 뒤에 회의합시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입으로 표현은 예배 보는 것으로 잘못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는 드리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 가운데 이런 자세로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나 운동경기나 연주회, 또는 무슨 오락 프로그램을 보듯이 예배를 관람하는 신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예배의 순서를 관람합니다. 예배 인도자 목소리는 어떤지, 기도인도자의 기도가 어땠는지, 찬양대원의 헤어스타일은 어땠는지, 누가 립씽크를 하는지, 설교자의 넥타이 색깔이 어땠는지, 설교 시간이 길었는지 짧았는지, 광고 시간이 어떠했는지를 구경합니다. 관람 거리로 여깁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은 없고, 구경거리만 있습니다. 예배는 구경하고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리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셋째로 “목사님, 오늘 예배는 좀 쎄게 봐 주십시오!”라는 말 속에 담긴 예배에 대한 잘못된 자세는 예배의 주도권을 교인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넘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목사님이 하나님과 가깝고, 자신은 목사님 보다 하나님과 덜 가까운 것 같다고 생각하여 목사님이 알아서 쎄게 예배를 봐주시면 좋겠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자신은 수동적인 입장으로 예배에 참여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난 후의 결과는 목회자가 쎄게 예배를 봤느냐 안 봤느냐에 따른 것이지, 자신은 그냥 목회자가 쎄게 예배를 보는 것을 보는 것으로 참여하는 것이 전부라는 입장입니다.
여러분, 목회자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는 책임을 맡았다고 하더라고 예배는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예배자입니다. 예배 순서를 맡았든지 맡지 않았든지, 목회자이든지 아니든지, 찬양대원이든, 예배 위원이든 모두가 예배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마치 무당이 알아서 굿판을 벌이면 되듯이, 예배순서를 맡은 이들이 알아서 예배를 진행하면 나는 어찌하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예배를 잘못 드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어느 모임에 가서 어떤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아는 척을 하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인사하지도 않고 못 본 척하고 말도 건네지 않을 때, 그 기분을 아십니까? 그 모임에 갔다 오면서 여러분을 외면하고 무시한 그 사람을 생각하며 씩씩거리며 화를 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는 하나님과 예배자와의 만남이며, 만남의 현장인데, 여러분은 예배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척하셨습니까? 하나님께 말도 건네지 않고 가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외면하고 무시하지는 않습니까? 한발 쑥 빼고 멀찍이서 하나님을 바라보기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각 순서를 통하여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분은 설교만 들으면 예배를 드린 것으로 생각합니다. 설교시간만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예배의 모든 순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배에로 초청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죄를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을 찬양으로 높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전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는 현장이 예배입니다. 또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며, 보혜사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가를 보면 그의 신앙 자세가 어떤지, 그의 영적 상태가 어떤지, 그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의 육안으로 보인 것만이 아닌 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에서입니다. 여러분, 예배 생활이 무너지면 신앙도 무너집니다.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예배는 대충 드리고 봉사 열심히 하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고,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모르고 착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는 신앙생활의 시작이자 중심입니다. 예배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제대로 신앙생활이 시작되지 않은 것이고, 예배 없는 신앙생활은 신앙의 중심이 빠진 껍데기뿐인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벽이 무너져 있으면 도둑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듯이, 과수원의 울타리가 허물어져 있으면 들짐승들이 쉽게 과수원의 열매를 따먹고 훼손시키듯이 예배가 무너져 있으면 신앙이 무너지고, 영성이 무너지고, 신앙이 마귀에게 도둑당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일예배를 소홀히 여기고, 주일예배에 참석하였더라도 예배를 관람하다가 가거나, 다른 생각만 하다가 가거나, 건성으로 찬송하고, 메마른 마음으로 기도하고, 강퍅한 마음으로 설교를 듣고 가고, 졸기만 하다가 갔는데도 은혜가 넘치고, 영적인 재충전이 충분히 되고, 영적 싸움에서 힘 있게 승리할 수 있던가요?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경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은혜를 깨달을 수도 없고, 예배를 통하여 회복과 재충전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휴대폰이나 전자 제품을 충전하는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충전기의 코드가 전기와 전자제품에 꽂아져 있어야 충전이 되는데, 꼽아져 있지 않은데 충전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영적인 코드가 꽂아져야 하는데 제대로 꽂지 않고서 어찌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어찌 영적 충전과 회복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어찌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간곡하게 권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권합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책망하는 마음으로 권합니다. 온전한 예배를 드리십시오. 바른 예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본문 시편 51편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왔을 때 쓴 시라고 표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통죄와,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 나가 죽게 한 자신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하나님과의 사이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고, 자신의 마음과 영이 더럽혀진 채로 구원 받은 기쁨도 다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시는 것 같고, 성령께서 자신에게서 떠난 것 같아 괴로워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회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며 정직한 마음, 정결한 영의 회복을 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어떤 예배인지를 알았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예배가 회복될 수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다윗은 본문 17절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34편 18절에서도,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상한 심령으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신다고 확신하며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본인의 경험과 깨달음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죄를 지었을 때, 각종 제물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각종 제물을 드리며 제사를 드렸지만 그의 마음과 영은 메마를 대로 메마르고, 즐거움이 사라졌고, 입술은 찬송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자원하는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려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마지못해 하나님께 봉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의 제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늘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려면 상한 심령으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상한 마음’에서 ‘상하다’는 ‘파괴시키다, 깨뜨리다, 부수다, 망가뜨리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성경번역본 [쉬운성경]에는 17절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제사는 깨어진 마음입니다. 오 하나님, 상처 난 가슴과 죄를 뉘우쳐 주님께 고백하는 마음을 주는 경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하나님, 내 제물은 찢어진 마음뿐,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당신께서 얕보지 아니하시니” 라고 번역했습니다. 상한 마음은 깨어지고 찢어지고 부서진 마음입니다. 죄 때문에 아프고 찢어진 마음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그 죄에 대하여 통회하는 마음, 그리고 용서를 비는 간절한 심령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상한 마음은 단순히 후회하는 마음이나 회환의 마음이 아니라 죄로부터 돌아서는 회개가 있는 마음입니다. 칼빈은 상한 마음을 자신이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한 자임을 절감하며 통회하는 겸손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아가 깨어진 마음, 교만이 깨어진 마음, 영혼의 딱딱한 흙덩어리가 깨어 부셔진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아가 부서지고 낮아진 마음입니다. 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예배를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자신이 깨끗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죄를 짓지 않고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 만큼의 깨끗함이나 선함과 의로움과 거룩한 상태를 항상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를 유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죄의 실재와 사탄의 활동으로 인해 우리는 늘 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 자신이 직접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주신 유일한 길이며, 은혜의 통로입니다. 기독교 예배는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과 의식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시고,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들이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이렇게 예배에로 초청하십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내가 만나기를 원한다!” “내가 너희 상처를 싸매며 너희를 고쳐주며 새롭게 하는 은혜 베풀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의인보다 회개하는 죄인을 더 기뻐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 비유에 나오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맏아들보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돌아온 탕자 둘째 아들을 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은 의롭고 떳떳하다고 고개를 바짝 들고 기도하는 바리새인보다 가슴을 치며 자신은 죄인이라고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한 세리의 기도를 더 기쁘게 받으십니다. 다윗이 죄를 짓고도 죄를 짓지 않은 척 제사를 드릴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으셨지만, 그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마음을 찢으며 회개하며 상한 마음으로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고, 다윗의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다윗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 없고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나는 죄인이며, 불의한 인간이며, 부족한 존재’라는 고백과 의식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의식은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겸손히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나는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내겠습니까?”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절실히 필요로 하며 사모하며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 저의 허물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 마음이 너무도 아픕니다. 괴롭습니다. 하나님! 상처 받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하나님! 제가 곤고한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마음이 몹시 지치고 낙심됩니다. 하나님! 저의 못난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저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보혜사 성령 하나님! 제 마음에 충만히 오셔서 새롭게 해 주시고 충만히 다스리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배는 단순히 은혜를 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시간입니다. 영적 코드를 다시 꽂고, 스위치를 다시 올리고, 막힌 것을 뚫고, 가려진 것을 허물고, 그래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복되는 것이고, 진정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는 건천(乾川)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건천이 뭐냐 하면, 조금만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시내나 강을 말합니다. 비가 오는 우기에는 강물처럼 물이 많이 흐르다가도 우기가 끝나 비가 그치면 금방 흐르던 물은 마르고 강은 바닥을 드러내어 물이 흐르던 자국만 남아있는 메마른 강, 메마른 시내를 말합니다. 시내나 강이 이루어지려면, 물이 솟아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발원지가 있습니다. 강원도 태백에는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연못이 있고,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발원지에서 끊이지 않고 물이 솟아나와 흐르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시작하여 흘러 흘러 마르지 않는 큰 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천은 발원지가 없습니다. 건천은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에만 물이 흐릅니다. 솟아 나온 물이 모여 흘러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물이 유입되어야만 비로소 강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건천과 옹달샘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건천은 밖에서 물이 흘러들어 와야 하고, 옹달샘은 내부에서 물이 솟아나옵니다. 끊임없이 솟아오릅니다. 거대한 물줄기는 아닐지라도 물이 메마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신앙인들 가운데 건천과 같은 신앙인이 있고, 옹달샘과 같은 신앙인이 있습니다.
건천과 같은 신앙인이란 예배나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으면 신앙의 강물이 흐르는 신앙인입니다. 은혜 받으면, 아멘도 크게 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섬기기도 하고, 눈물로 찬송하기도 하고, 교회서 살기도 하고, 원수를 사랑하기도 하고, 물질을 드리기며 헌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받은 은혜가 바닥이 나면, 곧 심령의 바닥을 드러냅니다. 비가 올 때는 흐르던 강물이 비가 그치면 바닥을 드러내는 건천처럼, 감추어 졌던 성질이 드러나고, 짜증이 나고, 조급해지며, 마음은 밴댕이 속으로 돌아갑니다. 이웃을 미워하고, 원수를 맺습니다. 예배가 짐이 되고, 헌금이 아깝고, 헌신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게 되고, 걱정이 충만, 불평 충만, 원망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또 은혜의 비가 내리면, 누가 은혜를 받게 해 주면, 설교가 귀에 들어오면, 기분이 은혜 받은 것 같으면, 분위기 좋은 것 같으면, 반짝 하다가, 다시 바닥을 드러냅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옹달샘과 같은 신앙인이란 내면에 예수님이 거하시는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주님이 생수이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충만히 거하셔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신앙인입니다.  
  요한복음 7장 37-39절에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모시고, 성령께서 함께 계셔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인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예수님을 마음속에 주인으로 모시고, 성령님을 충만히 모시기 위해 갈망합니다. 성령 충만을 구합니다. 그리고 성령님께 자신을 맡기고 순종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삽니다. 그래서 생수가 솟아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은 건천과 같은 신앙인이 아니라 샘과 같은 신앙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감옥에서, 독방에서, 오지에서, 교회도 없이, 신앙서적도 없이, 부흥회도 없이, 목회자도 없이, 기도원도 없어도 언제나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고, 하나님과 연결된 스위치를 끄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의 자세로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승리하며 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바르게 온전하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배 신앙의 벽이 허물어지지 않았습니까? 예배를 습관적으로 타성에 젖은 채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일예배를 안 드리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 같아 마지못해 예배에 참석하지는 않습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이 무거운 짐으로만 느껴집니까?
  성도 여러분, 예배가 무너지면 신앙이 무너집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예배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사모하는 마음과 갈망으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배에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오시옵소서. 임하시옵소서. 제 마음과 영을 만져주시옵소서. 내 안에 충만히 거하셔서 나에게서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옵소서.” 이렇게 갈망하며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진수성찬이 차려 있어도 여러분이 맛있게 먹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은혜는 상한 마음과 겸손한 자세와 기대하고, 갈망하며, 믿음으로 받아먹은 사람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은혜 받고 끝나는 신앙이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회복되고 재충전되어 삶속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3년 06월 09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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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가 심히 많더라
· 일시  2011년 01월 09일
· 말씀  에스겔 47장 6~12절
· 설교  이동훈 목사
   
오후예배 설교
 인정 받는 제직
· 일시  2011년 01월 02일
· 말씀  창세기 22장 11~14절
· 설교  오영만 목사 (안락교회 원로목사)
   
오후예배 설교
 오직 예수 그리스도
· 일시  2010년 12월 19일
· 말씀  요한1서 4장 9절
· 설교  김대민 목사
   
오후예배 설교
 예배자 입니다
· 일시  2010년 11월 28일
· 말씀  로마서 12장 1~2절
· 설교  정지환 전도사
   
오후예배 설교
 여호와를 송축하라
· 일시  2010년 11월 07일
· 말씀  시편 103편 1~5절
· 설교  이동훈 목사
   
오후예배 설교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
· 일시  2010년 10월 31일
· 말씀  시편 46편 5절
· 설교  김대민 목사
   
오후예배 설교
 나는 어떤 사람인가?
· 일시  2010년 10월 24일
· 말씀  로마서 3장 10~18절
· 설교  정지환 전도사
   
오후예배 설교
 주 예수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
· 일시  2010년 08월 22일
· 말씀  마가복음 5장 25~34절
· 설교  김대민 목사
   
오후예배 설교
 그래도 믿어야 합니다.
· 일시  2010년 08월 15일
· 말씀  하박국 3장 16~19절
· 설교  정지환 전도사
   
오후예배 설교
 오직 은혜
· 일시  2010년 07월 25일
· 말씀  사무엘상 30장 5~8절
· 설교  김대민 목사
   
오후예배 설교
 굳게 섭시다
· 일시  2010년 06월 06일
· 말씀  히브리서 10장 19~25절
· 설교  이동훈 목사
   
오후예배 설교
 변화시키는 힘
· 일시  2010년 05월 23일
· 말씀  빌립보서 1장 8~12절
· 설교  장시옥 전도사
   
오후예배 설교
 네 것이 되리라
· 일시  2010년 05월 16일
· 말씀  여호수아 17장 14~18절
· 설교  이동훈 목사
   
오후예배 설교
 오직 교회
· 일시  2010년 05월 02일
· 말씀  룻기 1장 1~5절
· 설교  김대민 목사
   
오후예배 설교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 일시  2010년 04월 24일
· 말씀  사무엘상 7장 3~9절
· 설교  이동훈 목사
   
오후예배 설교
 오직 주님
· 일시  2009년 12월 20일
· 말씀  누가복음 4장 16~19절
· 설교  김대민 목사
   
오후예배 설교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 일시  2009년 12월 13일
· 말씀  에스겔 11장 22~25절
· 설교  정지환 전도사
   
오후예배 설교
 부활의 주님께서
· 일시  2009년 04월 12일
· 말씀  요한복음 20장 24~29절
· 설교  이동훈 목사
   
오후예배 설교
 인생은 아름다워
· 일시  2009년 04월 05일
· 말씀  요한복음 12장 1~8절
· 설교  이동훈 목사
   
오후예배 설교
 마음을 다하는 찬양
· 일시  2008년 12월 07일
· 말씀  이사야 43장 21절
· 설교  강창우 목사
   
오후예배 설교
 아버지의 마음
· 일시  2008년 11월 30일
· 말씀  누가복음 15장 25~32절
· 설교  이무열 목사
   
오후예배 설교
 다시 하나님으로 소망을 갖자
· 일시  2008년 11월 16일
· 말씀  시편 42편 1~5절
· 설교  강창우 목사
   
오후예배 설교
 복음의 능력
· 일시  2008년 11월 09일
· 말씀  누가복음 4장 18~19절
· 설교  이무열 목사
   
오후예배 설교
 즐거움과 감사 그리고 찬송
· 일시  2008년 11월 02일
· 말씀  디모데후서1장 7~10절
· 설교  이동훈 목사
   
오후예배 설교
 교회는 무엇으로 세워지나?
· 일시  2006년 02월 26일
· 말씀  사무엘하 24장 10~25절
· 설교  황인학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