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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피조물  [3180]
· 설교 일자 : 2009년 01월 04일
· 본문 말씀 : 고린도후서 5장 16~17절
· 설교 :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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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피조물 (고린도후서 5장 16~17절)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통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에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정 채봉 씨의 “첫 마음”이라는 글입니다. 이런 첫 마음이 있을 때 새해, 새날이 새로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하고 우리나라 교회 초기에 선교사들이 우리말을 잘 몰라서, 설교시간에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왔습니다.’ 라는 말을 ‘묵은 년은 가고 새 년이 왔습니다.’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새해가 왔습니다. 벌써 오늘이 4일입니다.
  나는 매년 1월 1일 아침, 뉴스 시간에 방영되는 떠오르는 해에다가 절을 하며 소원을 비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들이 내 말을 들으면 발끈하겠지만, 헛짓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2008년 12월 31일이나 2009년 1월 1일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떠오르는 태양의 크기가 다릅니까? 밝기가 다릅니까? 아니면 2009년 1월 1일의 태양이 더 신선합니까? 물이 더 좋습니까? 아닙니다. 같습니다.
  1월 1일이 새로운 것은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자신 때문에 새로운 것입니다. 2008년을 마무리하고 2009년 1월 1일이라고, 새롭게 다짐하고 새롭게 희망을 품고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새롭게 시작한다고 한들, 우리 마음이 옛것 그대로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새롭지 않다면 새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17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 선언합니다. 새 것이 되었으니 새 것이 된 것을 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살아가지 않는다면, 새로운 날을 맞는다고 해도, 어제와 다름없고, 새해를 맞는다고 해도 지난해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삶이란 날짜,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의 변화에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본문 17절은 지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진정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에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어떤 소년이 목욕탕엘 오랜만에 갔습니다. 정말 너무도 오랜만에 갔기 때문에 몸에 때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 소년은 목욕탕에 근무하는 피부청결사 아저씨에게 때를 밀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때밀이 아저씨가 소년의 때를 밀려고 하니까 소년이 말합니다. “아저씨, 죄송해요. 제가 때가 좀 많아요.” “괜찮다, 때가 많으니까 목욕탕엘 오는 거지.” 그러면서 아저씨가 때를 밀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밀고 났는데 때수건을 미니까 또 다시 때가 나옵니다. “아저씨, 죄송해요. 때가 많아서......” “괜찮다....” 그런데 때를 다 밀고 확인 차 때수건으로 다시 미니까 또 때가 나오는 겁니다. 밀어도 밀어도 때가 자꾸 나옵니다. 때가 그치질 않습니다. 소년이 또 말합니다. “아저씨, 정말 죄송해요. 때가 많아서...” 아저씨는 때를 밀다가 지칠 데로 지쳤습니다. 그때 아저씨가 하는 말이, “그런데...얘야! 너 혹시 지우개냐?” 그러더랍니다. 지우개는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계속 나오지 않습니까? 그 소년의 몸을 문지르면 또 때가 나오고, 문지르면 또 때가 나오니까 지우개 아니고서야 어찌 이렇게 때가 많이 나올 수 있나 하는 생각으로 농담한 것이지요.
  여러분, 지우개는 자기의 몸을 달아 없어지게 함으로 연필로 잘못 쓴 글씨를 지워줍니다. 자기 몸을 희생해서 낙서를 지워 깨끗하게 합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 친히 지우개가 되셔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에 써 놓은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의 자국들을 지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을 우리에게 희생하심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깨끗케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가 지우개처럼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게 죄가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뉘우칠 때 회개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의 그 죄를 내가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 그래서 내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 대신 죄의 대가를 치러 주셨고, 나는 그 예수님께서 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머리속으로 이해하고,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주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입니다. 나는 주인이신 예수님의 종입니다. 종인 나는 주인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나를 다스려주십시오’라고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났습니다. 마음이 조금 바뀐 정도가 아니라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얼굴과 몸과 모습은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새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떤 달리기 선수가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이 시작되었는데 달리기 경기에 출전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더 이상 달리지 않는다면 올림픽 출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떤 농부가 땅을 샀습니다. 그런데 봄이 되었는데도 땅을 갈거나 씨앗을 뿌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땅을 샀다는 사실 외에는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농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어떤 신앙인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외에는 변한 것이 없다면, 진정으로 예수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달리기 선수는 달릴 때에 달리기 선수입니다. 농부는 농사를 지을 때 농부입니다. 예수님 안의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님 안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갈 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로마서 8장 9절 말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교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말씀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 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버리운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시험하고 확증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만약 여인이 임신을 하면 처음에는 임신 사실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떤 여인은 입덧도 합니다. 어떤 여인은 평소에 안 먹던 음식을 그렇게 먹고 싶어 합니다. 관심이 달라집니다.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생각과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속에서 생명이 자라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면,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다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주신 새생명이 점점 자라날 수 있도록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성장해야 합니다.
  나무를 심는 것도 정말 중요하지만, 심은 나무를 가꾸는 것은 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내 안에 예수님께서 풍성히 거하시어 나를 성장케 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나무는 심었는데 가꾸지 않아서 그 나무가 다 말라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나무가 땅에 그냥 박혀 있으니까 살았게거니 생각합니다. 봄이 되어 새싹이 나오지도 않고, 초록 빛깔도 띄지 않고 자라지도 않는데도 아무 문제없는 나무처럼 여깁니다. 때가 되면 자라겠지... 합니다. 생명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없기를 바라지만,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교회에 오래 다녔습니다.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하는 말,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의 가치관, 그 사람의 행동, 그 사람의 대인관계를 보면, 도저히 예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시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비록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기도할 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지만, 정말 그가 예수님을 믿을까, 정말로 예수님의 생명이 그 안에 계실까, 정말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일까 하고 의아스럽다면, 그가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적인 부분을 겉으로 보고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그의 열매로 좋은 나무, 못된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못된 나무라고 하셨습니다. 한두 번 그런 것이 아니라 나쁜 열매가 지속적으로 맺혀지고 있다면 심각하게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바르게 산다’는 말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속에 사신다.’는 말을 듣는 것이 더 적당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지 않으면, 선한 소원을 가지고 교회생활을 하고, 선한 뜻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한다고 해도,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따르면,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무기여 잘 있거라] [노인과 바다]등으로 유명한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견실한 복음주의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조부모는 선교사였고, 아버지는 헌신된 교인이자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의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헤밍웨이 가정은 더할 나위 없이 엄격한 기독교 규범을 따랐고,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헤밍웨이는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는 등, 교회생활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다 1차 세계대전이 터져 헤밍웨이는 적십자 요원으로 종군하다가 크게 다쳤습니다. 그는 그런 대규모 전쟁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죽음과 절망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의 기독교에 대한 열정은 점점 시들해져 이후 몇 년 사이에 그는 자신이 받은 신앙 양육을 저버렸고, 한때 받아들였던 기독교의 확실성과 신빙성을 부인했습니다. 그는 유명한 문학작품을 남겼지만, 불행한 결혼생활과 심한 신경쇠약으로 몇 차례 자살을 시도하다 결국 1961년 엽총으로 자살하였습니다.
  기독교 환경에서 살며 교리문답을 떼고, 규범을 준수하고, 성경의 진리를 전반적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요건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살아있고 생생한 관계를 가꿔 나가지 않는다면, 인생의 문제에 답이 없어 괴로울 때나 내면의 유혹의 충동을 물리치지 못할 때 신앙이 전혀 사용되지 않고, 신앙이 아무런 힘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인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과 아무런 개인적인 관계도 없는 사람인지,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자신 안에 예수님의 새 생명이 있는 사람은 자각증상을 느낍니다. 첫째, 예수님의 새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죄를 멀리하며 의를 행하는 데 열심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갈 때, 우리는 죄를 싫어하고, 죄를 지으면 그 죄로 인해 우리의 마음과 영이 불편함을 느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근심하시는 증상입니다. 죄가 찌르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님과 죄가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후에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한 목사님이 새벽 기도를 인도하는데, 찬송을 부르는 시간에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을 불렀습니다. 3절을 부르는 데 어느 여 성도 한사람이 통곡을 하며 기도하더랍니다. 그날, 목사님께 그 여 성도가 찾아와 돈 5천원을 꺼내 놓으면서 고백하더랍니다. 그 중년의 여 성도는 독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어린 자녀들과 함께 풀빵 장사를 하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날 새벽도 믿음으로 하루를 살고자 그 추운 새벽바람을 맞으며 먼 둑길을 걸어 새벽기도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에 와 보니 자기 앞에 오천 원짜리 지폐가 한 장 떨어져 있더랍니다. 그 당시 쌀 한 말에 천 원 정도 하던 시절이니, 그것은 쌀 반가마니를 살 수 있는 매우 큰돈이었습니다. 기도하면서 그 여 성도는 방석을 끌고 점점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지폐를 방석으로 깔고 앉는 데 성공을 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함께 찬송 28장을 부르는데 3절에 이르러서,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 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 인을 치소서” 이 찬송을 부르면서 그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기 시작하느라 그 시간에 통곡을 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그 여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더러운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자기를 구원해 주신 것이 생각 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바로 그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라는 것도 깨달아졌습니다. 그 주님이 자신 속에 계시다는 것도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니 그 여 성도는 차가운 예배당 바닥을 구르면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죄를 미워합니다. 죄를 지어도 회개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됩니다. 점점 더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말 듣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과거에 방식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삽니다.
  이전에는 자기 습관에 따라 살았습니다. 자기 욕심에 따라 살았습니다. 몸이 편한 데로 행했습니다. 죄에 오염된 채 태어난 자연인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자기 경험에 따라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같이 행했습니다. 세상 풍속과 세상의 학문에 따라 살았습니다. 이전에는 자기가 원하던 대로 살았습니다.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했습니다. 감정이 느끼는 대로 느끼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관계되어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주님께서 어떤 것을 원하실까,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생각하고, 예수님 관점에서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느끼려고 하니까 생각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습관이 달라지고, 인생관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고, 예수님 때문에 내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 때문에 내가 참고, 예수님 때문에 내가 침묵하고, 예수님 때문에 필요한 말을 하고, 예수님 때문에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예수님 때문에 내가 희생하고, 예수님 때문에 생명까지도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내 관심이 되고,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예수님의 인격이 내 인격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살아갈 때에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새로운 하루 하루를 살게 됩니다. 날마다 새롭게 되고, 날마다 변화되고, 점점 더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평안을 얻습니다. 용기를 얻습니다. 희망을 갖습니다. 능력을 받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은, 처음부터 완전히 예수님처럼 살아가지 못합니다. 내 삶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자꾸만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과거에 행하던 대로 행하고 싶어합니다. 그 때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계속적으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 어른이 되기까지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하듯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나를 이끌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온전히 날 다스리시도록 나를 맡겨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내 안에 충만히 거하시도록 나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 의지나 능력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력이, 성령의 은혜로 변화되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생명을 모시고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변화되고 있는 자신을 압니다. 내가 과거의 모습과 달라지고 있고, 내가 과거에 하던 생각이 달라지고 있고, 내가 과거의 습관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교우 여러분, 변화되고 있는 여러분 자신을 알고 있습니까? 확인하고 있습니까?
  물론 속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속 10킬로미터의 속도로 변화되어 가고, 어떤 사람은 시속 50킬로미터 속도로 변화되고, 어떤 사람은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아무리 빠르게 변화된다고 해도 변화의 방향이 틀리다면, 예수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피조물의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속도는 늦어도 예수님께 방향이 맞추어져 있고,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다면,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진정으로 새로운 삶을 원하신다면,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 묻고, 기도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야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내 안에 더욱 풍성한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죄와 유혹을 만날 때, 시험과 문제와 시련을 당할 때,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며,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시도록 구하여 옛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009년 01월 04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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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시편 49편 13~20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이름을 예수라 하라
· 일시  2008년 12월 25일
· 말씀  마태복음 1장 18~2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 일시  2008년 12월 25일
· 말씀  (본문을 기재해 주세요)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받아들이기 힘들 때
· 일시  2008년 12월 21일
· 말씀  누가복음 1장 26-3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나는 세상의 빛이니
· 일시  2008년 12월 14일
· 말씀  요한복음 8장 12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위기를 만났을 때
· 일시  2008년 12월 07일
· 말씀  이사야 37장 14~20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잃어버렸을 때
· 일시  2008년 11월 30일
· 말씀  요한 15장 1-2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함께 전도하는 교회
· 일시  2008년 11월 23일
· 말씀  요한복음 1장 43~5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을 자랑하라
· 일시  2008년 11월 16일
· 말씀  시편 105편 1~3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 일시  2008년 11월 09일
· 말씀  요한복음 14장 27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 일시  2008년 11월 02일
· 말씀  시편 136편 23~26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믿음으로 말미암아
· 일시  2008년 10월 26일
· 말씀  로마서 1장 16~17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