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짐 짓고 다니는 아이는 분명히 뒷짐 짓고 다니는 아버지의 아들이거나 뒷짐 짓고 다니는 할아버지의 손주입니다. 아이가 찬송을 부를 때 좌우로 흔들면서 부르는 아이는 할머니를 따라 구역예배에 가서 찬송할 때 좌우로 상체를 흔들며 부르는 할머니를 보고 따라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 아이가 코를 파서 벽에 바르더랍니다. 알고 보니 그 아이의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보다가 코를 파서 벽에다 쓱 문지르는 것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가 오순도순 대화하는 것을 많이 본 아이들은 대화를 잘 합니다. 부모가 책을 읽는 모습을 많이 보면서 자라난 아이들은 자기도 그림책을 들고 와서 부모 옆에 앉아 책장을 넘깁니다. 글도 못 읽으면서도 부모가 책 읽는 모습을 따라 합니다. 알콜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이 성장하여 알콜중독자가 된다든지,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이 나중에 자신도 결혼하여 아내에게, 자녀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를 싫어하면서도,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싫어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닮습니다. 왜 그럴까요? 수없이 보고 또 본 모습이 자신의 의식과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보는 대로 배우고, 보는 대로 따라하고, 보는 대로 닮아갑니다. 프랑스의 심리학자 자크 라깡(Jaques Lacan, 1901~1981)은 ‘거울이론’을 주창하였습니다. 거울이론이란 사람이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고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자기에게 보이는 사람을 보면서 자기의 모습을 만들어 가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의 핵심은 사람은 사람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며 다른 사람을 모방하며 성장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환경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물론 사람이 환경을 극복하며 살기도 하지만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사람은 자연 환경이 어떠한가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생활환경이 어떠한가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환경이 어떠한가에 따라 큰 영향을 받습니다. 사람환경이란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살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고 있으며, 그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근묵자흑, 근주자적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한 자는 검어지고 인주를 가까이한 자는 붉어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평생 함께 하니까 서로를 쳐다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닮게 됩니다. 불평을 많이 하는 아내와 함께 사는 남편은 자신도 모르게 불평하는 사람이 됩니다. 다른 사람을 험담하기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사는 아내는 자신도 모르게 험담하는 사람이 됩니다. 감사하는 말을 많이 하는 아내와 함께 사는 남편은 자신도 모르게 감사하는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 남편과 함께 사는 아내는 자신도 긍정적인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을 자주 보게 되고, 함께 하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언 22장 24-25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4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25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과 함께 어울리면 그들에게 양향을 받아 그들의 행위를 본받게 되고, 우리의 영혼이 올무에 빠진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갈 때, 가나안 족속을 살려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그 이유를 신명기 20장 18절에 설명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가나안 족속을 살려두면 그들이 좋지 않은 사람환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섬기던 우상을 따라 섬기게 되든지, 그들이 행하는 가증한 행위를 본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삼서 1장 11절에도 악한 것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요한삼서의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요한이서를 쓴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요한삼서입니다. 그 내용은 한 장밖에 안 됩니다. 요한삼서의 주제는 선한 것을 본받으라는 내용입니다.
당시 숙박업소가 발달하지 않았고, 순회 전도자들이 돈이 없으니 교회를 방문하여도 묵을 곳이 없었습니다. 가이오라는 사람은 방문한 순회 전도자와 사도들을 잘 대접하고 협조하였습니다. 방문객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은 순회 전도자들과 사도들을 접대하는 것을 거부하고 복음 전하는 일에 비협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디오드레베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합니다. 10절에 디오드레베가 어떻게 행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사도들에 관해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고, 여행 중인 그리스도인들, 순회 전도자들과 사도들을 접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접대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접대하지 못하도록 막고, 심지어 접대하는 사람을 교회에서 내쫓았습니다. 이렇게 하는 디오드레베에 대해 사도 요한은 교회 앞에 편지를 통해서 폭로하였습니다. 디오드레베는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교만한 자이며, 악한 일을 행하는 자라고, 그러므로 그와 함께 어울리지도 말고, 그를 본받지 말라고, 그리고 그렇게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한 자라고 단언합니다. 그의 행위는 하나님에게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그런 자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자이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한 자이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자라고 단호히 말합니다.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는 그 나무에 맺히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람이 악한 사람인지 선한 사람인지는 그 행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만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알아가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을 자꾸만 바라보는 사람은 그렇게 악하게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면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관심 있는 것을 바라봅니다. 관심은 어떤 것을 향하여 기우는 마음입니다. 공기가 기울면 바람이 되고, 때론 폭풍이 되듯, 물이 기울면 물결이 되고, 파도가 되고, 폭포가 되기도 하듯 마음이 기울면 관심이 되기도 하고, 그리움이 되기도 하고, 사랑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기울어지는 곳, 마음이 기울어지는 대상을 우리는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바라봄의 습관이 형성됩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에 기대하는 것,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얻기 위해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대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얻기 위하여, 회복과 치유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문제를 만나고, 어려움을 겪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을 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생각을 하나님께 집중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신앙이며, 바라봄의 신앙의 법칙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의 절정은 바라보는 대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본받는 것입니다.
사람은 바라보는 것에 영향을 받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1997년 87세의 나이로 돌아간 이듬해, 1998년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의대 교수가 발표한 논문에 ‘테레사 효과(Theresa effect in Calcutta)’란 용어가 등장합니다. 이 효과란 마더 테레사 수녀처럼 자신이 직접 봉사를 하는 것 경우 뿐 아니라 마더 테레사와 같은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선한 일, 봉사를 생각하거나 보기만 해도 신체 내에는 바이러스와 싸우는 면역물질 IGA가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이 면역물질은 나쁜 병균, 나쁜 세포를 물리치는 항생체입니다. 이것을 슈바이처 효과라 하기도 합니다. 실험에서 테레사 수녀의 일대기를 보여준 영상물을 보여 준 후, 침과 땀 같은 타액의 항생체인 IGA를 측정하였는데 IGA가 50%이상 일제히 증가함을 보여주었다 합니다. 남이 봉사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도 내 몸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은 우리에게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살아있는 존재는 모두 변화합니다.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변화합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든, 부정적인 방향으로든 변화합니다. 발전적인 모습으로든, 퇴보적인 모습으로든 변화합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가 하나가 있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변한다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변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노력이며, 중요한 것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닮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변해간다는 뜻입니다. 닮아가기 위해 본받습니다.
본받는 것은 사람이 배우고 성숙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본받을 대상으로 누구를, 또는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누구를 닮아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닮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배우고 따라하고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마음과 형상을 닮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은 우리가 변화해가는 목표가 됩니다.
믿음은 바라보는 대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을 갖기 전에는 다른 것을 바라보며 살았지만 믿음을 가진 후에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님이 우리가 변화해야 할 목표입니다.
요즘 롤 모델이니 멘토니 하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여러분의 롤 모델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인생 멘토는 누구입니까?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롤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멘토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믿음의 주이시며, 온전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눈을 고정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자꾸만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따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습니다.
바라보는 대상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변화가 일어나고 닮아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방송의 [성서학당]이라는 시간에 신우인 목사가 성서를 가르치면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두 종류의 관계가 있다고 말입니다. 상호 교환적 관계와 상호 변화적 관계입니다. 상호 교환적 관계는 서로 서로 교환하는 관계입니다. 상대에게서 내가 원하는 물건, 원하는 목표, 원하는 그 어떤 것만을 얻거나 주는 관계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가게 주인과 손님과의 관계가 상호 교환적 관계입니다. 돈을 주고 원하는 상품을 주고 받는 관계입니다. 이 상호 교환적 관계는 서로 만나고 관계가 형성이 되지만 상대방을 본받는다든지, 상대방을 사랑한다든지, 상대방을 통해 인격적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 관계입니다. 그에 반해 상호 변화적 관계는 서로를 통해서 변화하는 관계입니다. 상대방 때문에 서로 좋은 모습으로 변해가는 관계입니다.
가룟 유다는 3년 동안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보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자기 마음속에 예수님을 닮으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고 했습니다. 베드로도 3년 동안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보고 배웠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닮아 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고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본받는 제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상호 교환적 관계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과 상호 변화적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 둘의 인생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부부 사이가 상호 교환적 관계에서 못 벗어나니까 서로 상대방에게 요구만 하고,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사이가 상호 변화적 관계로 살아야 하는데, 상호 교환적 관계로만 생각하니까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패륜행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교사와 학생 사이도 상호 교환적 관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교권이 무너지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되지 않고, 학생들이 자기 인권만 주장하는 세태가 된 것입니다. 목사와 교인의 관계도 상호 변화적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신앙의 성장과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비본질적이고, 비신앙적인 것을 추구하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상호 교환적 관계에 머물러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단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정도의 관계로, 복을 주는 관계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이렇게 했으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주셔야 하고, 성공을 이루게 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복적인 신앙이 그런 신앙입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변화는 없습니다. 성장, 성숙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노력만 있습니다. 신앙의 목표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표는 단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신앙생활의 종착점은 천국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신앙의 목표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디모데후서 3장 16,17절 말씀에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배우는 것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도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천국에서 천국 백성다운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되어 살기 위해서입니다. 온전한 사람으로 홀연히 변화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사랑하는 대상에게 마음이 기웁니다. 사랑하는 분을 그리워하고 갈망하고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분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예수님을 묵상하게 되고, 예수님의 마음을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는 신비로운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바라봄으로 닮아가고, 바라봄으로 하나가 됩니다. 점점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상호 변화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성자 하나님이시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길은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성경 말씀 속에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성경 말씀 속에 예수님의 삶이 보입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셨는지,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셨는지, 어떤 자세로 사셨으며,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씀하고, 어떻게 행하셨는지, 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는지를 바라보고 닮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예수님을 닮아 우리의 믿음이 온전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예수님을 닮아 죄를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예수님을 닮아 유혹을 물리칠 수 있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예수님을 닮아 사탄의 궤계를 물리치고 원수 마귀를 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예수님을 닮아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긍휼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예수님을 닮아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성도 여러분, 땅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보이는 것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이 세상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함으로 예수님 안에서 하늘 세계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령한 세계,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문제와 고통과 풀리지 않는 일들을 하나씩 신앙으로 해결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천국가면 다 만날 텐데,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람이 되어 기쁨으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