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12장 1-9절) |
앞을 못 보는 맹인이 안내견을 데리고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한참 길을 걷고 있는데 안내견이 한쪽 다리를 들더니 맹인의 바지에 오줌을 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맹인이 갑자기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더니 안내견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지나가던 남자가 그 광경을 지켜보다 맹인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당신은 개가 당신 바지에 오줌을 쌌는데 과자를 줍니까? 나 같으면 이 개 머리를 한 대 후려 때렸을 텐데요.” 그러자 맹인이 말했습니다. “과자를 줘야 개머리가 어디 있는지 알잖소.” 그 맹인은 보이지 않으니까 바지에 오줌을 싼 개의 잘못을 고쳐주기 위해서 한 대 때리려면 개의 머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때리던지 할 거니까 개가 과자를 받아먹을 때 한 대 때리려나 봅니다.
맹인인 주인은 앞을 볼 수 없기에 모든 것을 다 맡기고 걸어가고 있는데, 맹인인 주인을 잘 인도해야 할 개가 주인 바지에다 오줌이나 싼다면 이건 보통일이 아닙니다. 황당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 차를 운전하면서 내비게이션의 오류로 엉뚱한 곳으로 안내를 받아 가 본적이 있습니까? 정말 당황스럽습니다. 인도를 잘 받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옛날 휴대폰이 나오지 않았던 시절에 대심방을 할 때는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 많았습니다. 처음 심방하는 교인의 집을 구역장도 잘 몰라서 설명을 듣고 찾아 갔는데 다른 동네에서 찾다가 심방 대원들을 기다리다가 집 밖에 나와 기다리는 교인과 서로 길이 엇갈린다든지, 참으로 찾아가야 할 집을 잘 인도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지난 주 성령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 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손길을 깨닫고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못된 길에서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뜻이 바로 우리를 잘못된 길에서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뜻이므로 우리는 잘못된 길에서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고 머물렀던 곳을 떠나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으로 선택하시어 복을 주시고,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부모의 집에 머물지 말고 떠나야 했습니다. 그곳은 우상이 가득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루며 살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1절에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줄 땅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말합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떠나라고 말씀하시고 과거의 장소에 머물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상황에 머물지 못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곳에 머물지 말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 친척과 부모의 집을 떠나라고 하시는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우리가 머물러 있는 곳에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여 챙겨서 먼 나라에 가서 그곳에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다 날려버렸습니다. 그 때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이 들자 돈을 뿌리면서 허랑방탕할 때 어울렸던 사람들조차 모두 다 등을 돌렸습니다. 흉년이 들면 인심도 사나와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살면서 돼지를 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밥을 제대로 주지도 않았고, 그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돼지가 먹는 주염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했지만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집의 품군들은 배고파 죽을 지경은 아닌데 자신은 먼 나라에 와서 이렇게 굶어 죽게 되었구나...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 일꾼이라도 해서 굶어 죽지는 말아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그곳을 떠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기다리던 아버지가 아들의 잘못을 책망하지 않고 기쁘게 맞아 소를 잡고 잔치를 벌입니다. 자, 여러분, 이 비유에서 먼 나라로 떠나 간 탕자 곧 둘째 아들을 그 곳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큰 흉년입니다. 흉년이 오자 변해 버린 사람들의 인심입니다. 그리고 돼지가 먹는 주염 열매조차도 먹을 수 없었던 처참한 상황이 허황된 꿈에 머물렀던 둘째 아들을 그곳에서 일어나 떠나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흉년이 찾아오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가난과 굶주림과 비참함이 닥친 일은 그를 그곳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품을 떠난 둘째 아들은 자신의 잘못된 집착과 허황된 삶의 자리에서 더 이상 머물지 않고 가야할 곳, 되돌아와야 할 곳, 그 자리를 떠나 돌아가야 할 곳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그리고 비참한 삶이 아니라 존귀한 삶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머물던 땅에서 일어나 떠나오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더욱 비참해졌을 것입니다. 그는 붙잡고 있던 돼지 주염 열매를 손에서 놓는 순간 그를 위해 기다리던 살찐 송아지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비참한 삶에서 풍성한 삶으로 바꿔졌습니다. 잘못된 자리에서 더 이상 머물지 않고 떠날 때 놀라운 회복과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둘째 아들이 만난 흉년과 같은 문제, 질병, 고난, 시련, 환란, 한계 상황을 통해 우리를 우리가 머물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나게 하십니다. 더 이상 거기에 소망이 없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동안은 그것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지 못하였다가, 마침내 어떤 문제와 질병과 고난과 시련과 환난과 한계 상황을 만나서야 뒤늦게 깨닫고 떠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여러분은 소를 먹이는 시골집에 불이 난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시골집에서 불이 나면, 외양간에 소가 절대로 밖으로 나오지 않는 답니다. 아무리 힘센 장사가 끌어내도 꿈쩍을 하지 않는답니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는 소를 밖으로, 신속하게 끌어내는 방법이 있답니다. 소의 여물통을 엎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가 생각하기를, '이제는 이곳에 소망이 없구나' '이곳에는 더 이상 내게 먹을 것이 없구나' 그리고는, 밖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의 글을 “여물통을 엎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여물통 때문에 불에 타 죽을 줄 모르고 있는 우리들의 여물통을 엎으실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놓지 않으려 하고, 전심으로 집중하는 것이 여물통인데, 자녀가 여물통이 되고, 건강도, 물질도, 명예도, 성공도 여물통이 되어 그것 때문에 꼼짝도 하지 않을 때 그것을 엎으셔서 머물던 자리에서 움직이게 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이런 사건들은 없습니까? 문제는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여물통을 엎으시는 사건은 없었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문제와 시련이 단지 해결되기만을 바라지 말고, 여러분을 지금의 상황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의 잡아끄시는 손길은 아닌지, 지금의 모습을 바꾸도록 독촉하는 하나님의 호루라기 소리는 아닌지, 지금의 모습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닌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사랑하는 가족 중, 사랑하는 친구 중, 사랑하는 직장 동료, 이웃들 중에 그들의 삶의 자리가 평안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하고, 기쁨이 없고, 건강의 문제라든지, 어떤 어려움을 만나 불안하고 낙심하고 절망가운데 있는 분들은 없습니까? 삶의 소망이 없어 곤고한 삶을 살고 있는 분들이 없습니까? 그들이 그 삶의 자리에서 더 머물지 않도록 하나님께 초청해야 합니다. 다음 주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보여주시면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갔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야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대를 이어 이삭이 가나안 땅에서 살고, 그의 아들 야곱과 그 가족들이 가나안 땅에 살다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 땅에 가게 된 것은 가뭄으로 인한 흉년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7년간 대 가뭄으로 식량을 준비하지 못한 야곱의 가족들이 가뭄 이전에 있었던 7년 풍년 때에 곡식을 비축한 애굽에 곡식을 사러 내려갔다가 애굽에서 총리대신이 된 요셉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요셉의 형제들과 조카들 모두 합하여 70명이 애굽으로 이주해 와서 고센이라는 땅에 살았습니다. 야곱과 그 가족들은 7년간의 흉년이 끝난 뒤에, 세월이 흘러 야곱이 그곳에서 죽고, 요셉도 애굽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그곳에 눌러 살았습니다. 비옥한 애굽땅, 문명이 발달한 호화스러운 애굽 땅에 눌러 앉았습니다. 그렇게 430년을 애굽 땅에 머물러 살았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애굽으로 간 후에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내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점점 인구수가 늘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왕은 견제할 수밖에 없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몹시 힘든 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산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들을 낳으면 그 자리에서 곧 바로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에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워 애굽에서 빼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도 건너야 했고, 광야 길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광야에 머물지 못하도록 약속의 백성으로서 살도록 40년 동안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먼저 그들에게 애굽 나라로부터 극심한 고난과 고역과 학대를 받게 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애굽 땅에 머물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극심한 고역과 학대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을 향해 머물렀던 땅을 떠나게 하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성취하시고, 복을 주시길 원하시지만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신을 차릴 만한 사건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손길을 믿고 믿음으로 반응할 때, 하나님의 약속의 복이 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임을 믿고 인도하시는 손기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요셉 이야기를 아십니까?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보디발 장군의 집으로 팔려가서 그곳에서 성실과 충성으로 일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 장군의 신임을 받아 그 집의 모든 일을 맡아 일했습니다. 그런데 보디발 장군의 부인, 그 집의 여주인의 유혹을 뿌리치는 과정에서 오히려 요셉이 여주인을 성폭행하려고 했다고 누명을 쓰고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감옥에 왕의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이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함께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들이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요셉이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 해석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풀려나 복직이 되었습니다. 그 일이 나중에 애굽 바로왕이 꾼 꿈을 아무도 해석하지 못할 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추천하여 꿈을 해석해주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되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을까요? 억울한 누명을 쓴 일은 괴롭고 절망스러운 일이지만, 그래서 왕의 죄수들이 갇히는 감옥에서 생활한 것으로 인해 나중에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고 결국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도록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요셉을 감옥으로도 인도하셨습니다.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주인의 신임을 받으면서 그곳에서 편안히 세끼 밥 잘 먹고 주인의 비위를 맞춰가면서 살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그 집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꿈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총무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이라는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어 요셉의 아버지와 형제들과 조카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며 인도하심을 믿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에게 행하시는 손길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처럼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코 앞의 것만을 보고 있어서 금방 좋지 않으면 금방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들은 멀리 보았습니다. 믿음으로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의 상황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더 온전케 하시기 위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우리를 계속적으로 고치시고, 훈련하시고, 연단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 11장 45절에,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48절에,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누가복음 6장 36절에,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얼마나 부담스러운 말씀입니까? 우리가 거룩해지다니요? 우리가 온전해지다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온전해지라고, 거룩해지라고, 하나님처럼 자비로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기대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더욱 온전케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함께 일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 놀라운 능력을 행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더 큰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지금 가지고 있는 믿음에 머물지 못하도록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제물로 받치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더 큰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믿음의 테스트를 통과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 새로워지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어제의 모습, 어제의 습관, 어제의 신앙체험, 어제의 믿음, 어제의 내가 새로워지도록 하나님의 손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머물러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못 보십니다. 과거에 묶여 있는 우리의 감정과 상처와 부정적인 기억들, 경험들에 머물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십니다.
물이 흐르지 않고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고인물이 됩니다. 고인물은 썩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이 고인물이 되지 않도록 흘러가게 하십니다. 피가 순환되지 않으면 피덩어리가 됩니다.
한 번 은혜를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만 있다면 고인물이 됩니다. 은혜는 계속적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져서 은혜가 흐르게 해야 합니다. 고여 있으면 은혜는 썩습니다. 은혜는 메마릅니다. 그래서 은혜를 강물같은 은혜라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면 머물게 됩니다. 지금이 편하다고 주저앉아 있으면 머물게 됩니다. 나이가 들면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엉덩이도 더욱 펑퍼짐해집니다.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을래~ ” 자기 발전이 없어집니다. 자신에 대해 쉽게 포기합니다. ‘이 정도면 됐지’ 할 때 고인물이 됩니다.
여러분, 장로가 되거나, 안수집사가 되거나, 권사가 된 후에 신앙 성장이 없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타성에 젖을 것일까요? 교만해서 그럴까요? 적당히 분위기에 맞게 묻어가고 있기 때문일까요? 그 안을 들여다 보면 새신자들보다도 신앙이 자라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도하시는 대로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는 자기 생각과 자기 욕심과 자기 자존심을 살려가며 인도함을 받으려니까 거기에 무리가 오는 것입니다. 기계가 돌아가고 있는데 순리대로 돌아가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을 무리하게 안 돌아가게 하려니까 기계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대하고 계신데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금 머물러 있는 곳에 계속 머물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잘 알기에, 자신의 지금의 모습에 안주하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푯대를 향하여 날마다 머문 자리에서 떠나 앞을 향해 달려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 이하에,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교우 여러분, 지금 평안합니까? 지금의 평안에 만족만 하지 마시고 더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평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더욱 온전한 신앙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평안하지 않습니까?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금의 상황에 머물지 않고 벗어나기를 원하셔서 그런 일을 허락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자기 여물통 챙기느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신앙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새롭게 하시고 더욱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변화를 추구하십시오. 머물러있는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체면이라는 여물통을 엎으십시오. 그리고 머물던 자리를 떠나 회복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비록 문제와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약속의 손길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푯대를 향하여 날마다 뒤에 것을 잊어버리고 앞을 향하여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이 늘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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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5월 30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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