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하나님을 기쁘시게 (로마서 14장 13-20절) |
믿음이 좋은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핍박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찬송가 342장(구 찬송가 395장) “너 시험을 당해 죄 짓지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쳐라 너 시험을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심방 온 성도들이 시어머니에게 전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며느님이 늘 시어머님을 위해 얼마나 눈물로 기도하는지 아세요?” 그러자 시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내 며느리는 왕내숭이예요. 눈물로 기도하기에 가만히 들어보니 시어미를 이기자는 노래만 부르고 있습디다.” “아니 무슨 찬송을 불렀는데요?” 시어머니는 곧장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 시어밀 당해 죄 짓지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쳐라 너 시어밀 이겨 새 힘을 얻고...” ‘너 시험을 당해’를 ‘너 시어밀 당해’로, ‘너 시험을 이겨’를 ‘너 시어밀 이겨’로 듣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 오해를 해도 크게 오해를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데로 보고 자기가 생각하는 데로 판단합니다.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 오해하거나, 기독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판단하고 함부로 공격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과거에 기독교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오해해서 그랬던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금방 완벽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고, 뭘 잘못하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그런다고 비방하고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공사중’ 팻말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팻말을 목에 걸고 다니든지, 가슴에 명찰처럼 달고 다니든지, 공사중이라고 글씨 쓴 모자를 쓰고 다니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은 ‘공사중’인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금방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불완전한 죄인들이 모인 곳이며, 공사 중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공사가 완공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공사 중인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공사가 끝난 뒤에 완공된 건물에 하자가 생기고, 물이 새고, 벽이 금가고 사람이 살 수 없는 건물이라면 그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사중일 때에는 괜찮습니다. 다시 공사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공사중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공사중이기 때문에 우리의 허물과 실수와 죄악이 발견되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고쳐주시고 다시 공사하게 하십니다. 긍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도와주십니다. 공사중인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신앙생활이란 제멋대로 생긴 우리를 거룩하게 바꾸어 가시는 점진적인 공사 진행 과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완성인 모습을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지속적으로 공사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완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에는 공사중인 우리의 모습이 완공되어 준공검사가 딱 떨어져야 합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그 말입니다.
여러분, 어느 곳을 가다 보면 누가 빌딩을 짓다가 부도가 나서 방치된 건물을 볼 때가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흉물스럽게 된 건물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도 그 건물을 인수하려고 하지도 않고, 이제는 어쩌지 못하는 공사가 멈춰진 흉측한 건물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절대로 그런 건물과 같은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시간은 걸려도 여러분의 인생이라는 건물은 계속 공사중이어야 합니다. 인생부도가 나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 이틀, 한해 두 해는 쉴 수는 있어도 계속 공사중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천국 들어갈 때까지 공사중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맞아 주시는 훌륭한 모습으로 완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곧 하나님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기쁘게 살아가는 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곧 나 자신도 기쁘게 살아가게 되는 삶이고, 또한 나와 함께 하는 다른 사람들도 기쁘게 살아가도록 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교제해야 하지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살아가면서 잠시 멈추고, 또한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교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꼭 필요하고 우리의 삶에 핵심적인 것이지만 그냥 그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수직적인 교제인 하나님과의 교제와 수평적인 교제인 사람과의 교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위로는 하나님과의 교제, 옆으로는 사람과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성도간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명의 틀과 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받은 말씀, 깨달음, 은혜, 능력을 수평적 차원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 성도간의 교제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 신앙입니다. 공동체를 떠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공동체에서 벗어나서 혼자서 갖는 신앙, 하나님과 자기만의 교제만 있는 신앙, 혼자서 성경을 해석하고 혼자서 기도하고, 혼자서 신앙을 가지려고 하면, 백이면 99.9999%는 치우친 신앙, 삐뚤어진 신앙, 어그러진 신앙, 잘못된 신앙이 됩니다. 영적인 일이 그렇게 쉽고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성령도 있고, 악령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만만한 책이 아닙니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책입니다. 계시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자기 한계에 부딪혀 그 이상을 혼자서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혼자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거나 혼자서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 자체가 공동체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함께 서로 서로 영적인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교제는 필수입니다.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교제는 여가 선용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사교적인 사치도 아니고,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영적 필수 과정이고, 영적 공사중 과정의 중심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는 단순히 다른 그리스도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누구누구와 친합니다. 그러므로 교제를 잘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항상 맞는 말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교제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바른 교제일 수도 있고, 잘못된 교제일 수도 있습니다. 영적인 교제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6절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성도들이 서로 선행을 행하고,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삶의 현장에서 서로 선행을 하고, 서로 받은 은혜를 나누는 친교를 열심히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교회 안의 영적인 교제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방 신전에 받쳐진 고기를 사서 먹는 문제로 교회 안에 믿음이 강한 사람과 믿음이 약한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에 대해 사도 바울이 가르치고 권면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 마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평강과 즉 다른 성도들과 연합하는 것과, 희락 즉 영적인 만족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거리끼게 생각하는 것과 자신의 삶의 방식을 다른 성도들에게 강요하기보다는, 조화를 유지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 즉 하나님 나라의 가장 본질적으로 옳은 것을 행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인데, 하나님 나라의 가장 고귀한 가치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자기 권리만을 주장하고, 다른 성도들의 입장을 관심 갖지 않고, 배려하지 않는다면 형제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행함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이 비방 받지 않도록 하라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교회 안의 성도들 간에 서로 신앙을 세워주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최고의 가치인 사랑을 따라 서로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노력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함께 서로의 신앙성숙을 돕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형이 동생을, 언니가 동생을 도와주고, 챙기고,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함께 교제하고 서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시기를 원하시고, 그 모습을 보실 때 기뻐하십니다. 이런 모습을 시편 133편 1절에,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며 온전한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이 함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공사중이라는 말은, 우리 모두가 미완성 존재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가 미완성 존재라는 말 속에는 우리 모두가 부족한 존재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 부족함을 혼자서 해결하기에는 우리는 연약합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혼자서 온전해 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 2장 22절에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함께 서로 성장을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세상으로부터 부르시어 교회를 이루게 하신 목적 중에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이것을 위해서입니다. 서로 돌보고 세워주고 온전케 하도록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제가 테니스를 대학교 3학년 때부터 했습니다. 그냥 조금 칩니다. 그런데 테니스를 치다보면 실력이 더 이상 늘지 않고 자꾸만 게임에서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함께 게임을 하는 친구나 테니스 동료들이 나의 고민을 알고 코치를 해 줍니다. 공을 칠 때 자세가 높다, 공을 맞추어 치는 타점이 늦다, 높다, 공을 친 다음에 다음 동작이 어떻다... 이런 말을 해주면서 게임을 합니다. 그럴 때 그 말을 귀담아 듣고 자세를 다시 고치고, 지적해 주는 부분을 마음속에 담아서 공을 치면 조금씩 더 좋아집니다. 비록 제가 테니스 경기로 비유를 했지만,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대화를 통해서, 신앙을 나눔으로써,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고, 함께 고치고 함께 보완하고 함께 새로워져 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성도의 교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성경에는 서로 덕을 세우라, 서로의 짐을 지라, 서로를 위해 기도해라, 서로에게 친절하게 대해라, 서로에게 복종해라, 서로에게 환대하라, 서로를 위로하라, 서로를 용서하라, 서로를 바로잡고, 서로에게 권고하고, 서로를 가르치며, 서로를 격려하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얼마나 많은 곳에 말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교우 여러분, 서로 신앙성숙을 돕는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주위 환경에도 불구하고 환경을 극복한 사람도 있지만, 그 극복이라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의 환경 중에 사람 환경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신앙의 환경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좋지 않은 영향을 받아 신앙이 자라지 않고,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 중에, 교회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나오고, 교회 생활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신앙이 자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재작년이나 작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화가 없고 신앙이 자라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거나, 뒤로 퇴보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사실 제자리에 머무는 사람은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든지 뒤로 물러서는 경우만 있습니다. 그런 교인은 보통 주위에 불신자 친구나 세속적인 교인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환경 속에 있으니 신앙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온통 관심이 세속적인 일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온통 함께 하는 시간에 육신적인 일만 함께 하고 있는 교인들이 자기 환경이 되어 있다면, 그 결과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좋은 신앙 환경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좋은 신앙생활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좋은 환경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고 잠언 27장 17절에 말씀합니다. 서로 서로에게 유익을 끼치고, 서로를 바르게 하고, 서로를 지혜롭게 하고, 서로의 신앙을 세워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서로 좋은 방향으로, 선한 방향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서로 자극이 되고, 서로에게 도전을 주고, 서로를 세워주고, 서로 상생하는 관계의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주일날 예배 마치고 오후찬양예배시간까지 교회의 곳곳에 모여서 쉬거나 대화를 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교우들이 함께 모여 대화하거나 함께 시간을 갖을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나오는 말들이, 어떤 내용들입니까? 만약 그 자리에서 맨 세상 이야기, 남 얘기,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 신 목사가 어쩌구 저쩌구, 부교역자가 어쩌구 저쩌구, 당회가 어쩌구 저쩌구..., 자기 자랑이나 늘어놓고, 툴툴 불평이나 하고, 백화점 세일하는 이야기, 어느 미용실 어떻다는 이야기, 정치판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십시오. 좋은 신앙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환경에서는 여러분이 오전예배 때 받은 은혜를 다 날려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지 않으려면, 이렇게 말하십시오. “그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다른 이야기로 넘어갑시다!” “그 부분은 우리가 기도합시다.”
우리 교회에 몇 년 전에 와서 강의해 주신 전남대 교수이고, 정신과 의사인 이무석 장로님이 쓴 책에 나온 내용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독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이 사람에게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성도의 신앙에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 약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사랑과 지혜와 말씀과 힘을 받아 서로에게 약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제대로 이루지는 신앙인은 실수할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약이 되는 사람이 됩니다. 본문 19절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말씀처럼, 교우 여러분, 다른 성도들과의 교제에서 약이 되고,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 줍시다. 화평의 일을 도모합시다. 내가 먼저 좋은 신앙 환경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 신앙 공동체 안에 가시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마음에 안 맞는 사람이 늘 있습니다. 걸림돌과 같은 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교회생활이 힘들고, 다른 교회에 가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교회에 가도 그런 사람이 또 있습니다.
세계적 역사가 토인비박사가 즐겨 하던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북해 바다에서 청어 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먼 거리의 런던까지 청어를 싱싱하게 살려서 운반 하는가’였습니다. 어부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배가 런던에 도착해 보면 청어들은 거의 다 죽어 있습니다. 그러나 꼭 한 어부의 청어만은 싱싱하게 산채로 있더라는 겁니다. 알고 보니 청어를 넣은 통에 메기를 한 마리 잡어 넣으면, 메기가 청어를 두세 마리 잡어 먹기는 하지만, 다른 수백 마리의 청어들은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계속 열심히 헤엄치고 도망 다니느라 먼 길 후에 런던에 도착해 봐도 청어들은 여전히 살아 싱싱하답니다. 메기로부터 살아나기 위한 몸부림이 결국 청어들을 건강하게 살아있게 하는 방법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 메기가 있습니까? 나를 건강하게 하고 내 신앙을 살아있게 하는 메기가 있습니까? 그 메기가 없으면 딱 좋겠지요. 그 메기만 없으면 교회 생활이 천국 같겠지요. 그 메기만 교회에서 안 보면 살맛나는 신앙생활이 될 것 같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을 그렇게 놔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신앙이 단맛만 보는 신앙이 아니라 쓴맛 신맛 매운맛 괴로운 맛을 통해서 진정한 신앙인으로 훈련하시려고 교회 안에 메기를 놔두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밭에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12제자 중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정신 차리고 중요하게 생각할 점은 우리 자신이 가라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메기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라지는 심판 날에 진노의 풀무불에 던져지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자신에게 좋았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게 대해 피차 공사중인 사람임을 알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서로 피차 훨씬 더 교제가 잘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너도 공사중이고 나도 공사중이고 피차가 공사중이니까 그럴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면 상대방 때문에 실망도 더 적게 할 수 있고, 상처도 덜 받을 수 있고, 실족하는 일도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고난을 겪고 난 후에 지혜와 신앙이 훌쩍 성장하는 것처럼, 신앙생활 중에 어쩌면 필수코스로 성도의 고통스러운 교제를 통해서 신앙이 훌쩍 성장하고, 영성의 깊이가 깊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로 향하여 가는 여행길에 성도들과 함께 동행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교제없이 온전한 신앙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받은 은혜와 사랑으로 서로 돕고 신앙성숙을 도와야 합니다. 서로 좋은 신앙환경이 되어 줍시다. 성도들과 함께 화평하고, 덕을 세워서 함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의 교제가, 우리 양정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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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1월 31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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