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이기 힘들 때 (누가복음 1장 26-38절) |
여덟 살짜리 위탁 아동을 맡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어제는 아이가 학교엘 가지 않았다. 아프다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에서 나오지도 않는다. 방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울고 있었다.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생각했다. 나는 아이의 기분을 전환해 줄 겸 함께 외출하자고 했다. 쇼핑 몰에 장난감 사러 가자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베개를 내게 던지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는 1년 전에 엄마에게서 버림을 받았는데, 엄마가 함께 쇼핑몰에 데리고 갔다가 아이를 버리고 도망을 친 것이었다. 이혼한 엄마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는데 7살 된 자식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마침내는 북적대는 쇼핑몰에 아이를 팽개치고 가버렸던 것이다. 아이는 쇼핑몰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또 버림받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이다.’ 그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어두운 경험 때문에 장난감을 사러 외출하자는 위탁부모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속에 상처나 어두운 경험, 쓴뿌리가 있으면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말을 어떤 사람은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어떤 사람은 삐딱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처를 받습니다. 설교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현 신앙의 상태와 자신의 마음속에 상태에 따라 똑같은 설교를 듣고서도 반응이 전혀 다를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서 상처받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설교 듣고서 시험에 들지 않는 것도 신앙이다. 그렇습니다. 교회 생활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이런 저런 말에 삐끼지 않는 것도 신앙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말을 하면 스폰지 같아서 쑥~ 스며들어갑니다. 남들이 듣기에는 자존심 상할 만한 말을 들어도 쑥~ 스며들어가 잘 소화시킵니다. 그런 사람을 일컬어 성격이 좋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넓은 것이지요.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성숙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벽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말만 하면 벽에 공을 던진 것처럼 튀어 나옵니다. 그런데 튀어 나오는 공이 던진 것보다 더 쎄게 더 뾰족하게 튀어 나옵니다.
30살 난 정 모씨 70만원의 고시원 비용도, 예비군훈련 불참 벌금을 낼 돈도, 휴대전화 요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난 10월에, “조국은 나를 버렸으며 이젠 필사의 항쟁뿐이다. 내 마지막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라며 소지하고 있던 회칼로 화재를 피해 뛰쳐나오던 6명을 찔러 죽이고 7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증오심과 적개심을 드러냈습니다. 이 사건이 논현동 고시원 방화 살인사건입니다.
유 영철! 그 이름만 이야기해도 그가 행한 극악무도한 범죄를 잘 아실 것입니다. 10개월간 21명 이상을 강간하고 살인하고 시체를 유기한 사람, 사람이라고 부르기에는 참으로 짐승만도 못한 사람, 인육까지 먹는 인면수심의 범죄자입니다. 그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가 절도죄와 같은 죄를 지어 교도소를 드나들어서, 부인이 이혼을 하자 앙심을 품고 살인을 시작하여 그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당한 것만을 앙심으로, 복수로 불특정인들에게 뭇지마 살인을 한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 시간에 소개했던 미국 전투기 추락 사고로 온가족을 잃은 윤 동윤씨가 많은 사람이 보내준 후원금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는 기사가 지난 금요일 신문에 났습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많은 분이 정성껏 보내주신 후원금은 나를 위해 쓰라고 하는 게 아닌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내가 고운 마음으로 생전에 매달 기부해 오던 어린이 재단과 기독교 단체에 보내 그 뜻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하면서 도와주신 손길이 너무도 감사할 따름이며 더 이상 주위 사람들에게 심려를 끼치지 않고 잘 극복하려고 애쓰겠지만 문득문득 솟구치는 슬픔을 참기 힘들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중국 헤이룽장성에 사는 중국동포 방 일성(18)씨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이 월자(50)씨, 남편 없이 네 아이를 키운 그녀는 아들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갈 것을 걱정하다가 수술비를 벌기 위해 2006년 12월에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이 월자씨는 비자만료 3년 안에 수술비를 벌려고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며 월세 20만 원 짜리 고시원에서 생활을 해 오던 중 바로 그 논현동고시원 방화 살인사건 때 범인 정씨의 칼에 찔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여한 방 일성씨의 가슴은 새카맣게 타들어갔습니다. 그는 갓 돌이 지났을 무렵 펄펄 끓는 가마솥 물에 빠져 다리와 발이 비틀린 장애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그 청년을 돕기 위해 한국교회와 병원, 그리고 이웃이 나서서 수술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한국외국인근로자 지원센터와 한국교회봉사단 등에서 힘을 보탰습니다. 명성교회 교인들은 1주일에 두 세 번씩 방 씨를 찾아 떡과 과일, 음료수 등 푸짐한 간식을 제공했습니다. 간호사들은 친절하게 방씨의 머리와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한국교회봉사단 김 종생 사무처장은 희생자 장례식 때 가장 우울해 했던 사람이었는데, 표정이 너무도 밝아졌다고 귀띔을 했습니다. 방 씨의 꿈은 한국에서 운전을 배워 몸이 불편해 이동하지 못하는 장애인을 돕는 택시기사가 되는 게 꿈이랍니다.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고시원 방화 살인범 정씨와 유 영철, 그리고 방일성씨와 윤 동윤씨는 전혀 다른 반응을 하였습니다. 방일성씨는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한국교회와 병원과 교인들의 사랑의 봉사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온 가족을 전투기추락으로 잃은 윤 동윤씨에게도 주위의 위로와 후원이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윤 동윤씨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후원금을 자선단체에 기부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처녀인 그에게 메시야를 잉태하여 낳을 것이라고 알려주는 내용과 그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시골 처녀입니다. 신약 성경에만 6명의 마리아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흔한 이름입니다. 마리아는 세상에 내세울 학력도, 약력도, 이력서나 명함도 없습니다. 대단한 신학적 훈련을 받지도 않았고, 메시야를 자기 몸에 잉태하기 위해 따로 준비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우리는 마리아의 몸에 예수님이 잉태되어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 당시 상황으로 짐작할 때, 마리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자신의 몸에 일어난다는 소식을 천사에게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다가왔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갖게 된다는 받아들이기 힘 드는 일 앞에서 선택해야 했습니다. 선택하게 되면, 모험과 위험이 따르는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아이를 잉태하는 일은 혼전임신으로 간음의 누명을 쓰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약혼자와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가정에서도 혼전 임신한 딸 때문에 수치스럽게 여겨 문제가 생길 것이고, 고향 나사렛에서도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문제가 생길 것이고, 앞으로 살아가는 일에 지속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더 나아가 마리아는 자신의 특별한 아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긴장해야 하고, 십가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는 아들의 뒤를 따라가며 슬픔을 삼켜야 하고,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피 흘려 죽어가는 아들을 보며 마리아 자신의 마음과 영혼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견디어 내야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사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성육신 사건은, 마리아에게는 모험적이며, 아주 위험하고,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입니다. 분명 마리아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일,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을 겪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생각지 못한 일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자녀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극심한 심리 장애가 왔다든지, 사업이 갑자기 다른 사람들에 의해 연쇄부도를 맞게 되었다든지, 미국 전투기 추락사고와 같은 사건을 겪게 된다든지, 나는 차선도 잘 지키고, 신호등도 잘 지키고, 안전 운전을 하고 다니는데 반대 차선에서 음주 운전하는 사람이 중앙선을 넘어와 충돌하게 되어 심하게 다쳤다든지, 담배도 안 피는 사람인데 폐암에 걸렸다든지, 갑작스럽게 가족이 죽었다든지, 평생 몸 바쳐 일한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한다든지, 순식간에 일어난 파산, 뭇지마 범죄 등 이런 일들은 우리가 참 받아들이기 힘든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일, 내가 예측하지 못했던 일,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건,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 인생을 뒤흔들어 놓는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코리 텐 붐 여사는 그런 사건을 “전환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살아왔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전환점입니다. 코리 텐 붐 여사에게는 그 전환점은 현관문을 두드리는 독일 병사들의 노크소리로 닥쳐왔습니다. 문을 여는 순간 나치수용소로 잡혀갔고, 그녀의 삶은 순식간에 정상적인 삶에서 무시무시한 공포로 바뀌었습니다. 그런 일들은 그야말로 무슨 날벼락처럼 우리에게 들이닥쳐서 우리의 삶을 확~ 뒤집어 놓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순탄한 일들만 겪었습니까? 여러분이 쉽게 이해되고 납득될 만한 일들만 일어났습니까? 아니면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그런 일이 내게 왜 일어났는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한 그 사람이 내 삶 속으로 왜 들어왔는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우리가 이해되는 일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는 일만 겪으면서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무석 교수가 쓴 [30년 만의 휴식]이라는 책에서, 이 무석 교수의 경험에 따르면, 인생의 고통은 현실을 회피하는 데서 시작되며, 그리고 많은 인생의 고통은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극복된다고 합니다. 미국 정신과의 스트레스 센터에서 회원들에게 가르치는 기도문이 있답니다. “주여, 제가 ‘바꿀 수 있는 일’은 바꿀 수 있도록 힘을 주옵소서. 그러나 제가 ‘바꿀 수 없는 일’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내심을 주옵소서. 그리고 제게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주옵소서.” 라인홀드 리버의 기도문입니다. 바꿀 수 없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스트레스가 극복이 된다는 것이 정신과 의사들의 처방입니다.
요셉은 자기 형들이 자기를 애굽의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긴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을까요? 요셉은 자기를 팔아버린 형들이 밉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만약 요셉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면, 아마도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의 노예로 팔려가서 노예가 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는 야곱의 아들이며, 채색 옷을 입었던 너무너무 소중한 사람’이라고 고래 고래 소리치며 반항하였을 것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형들에게 복수하려고 탈출을 시도했을 것이며, 끊임없이 다시 잡혀 와서 극악한 벌을 받았을 것이고, 결국 그러다가 처참한 신세로 죽어갔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의 현실을, 자기의 상황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또한 이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시기를 원하실까 를 묻고 그 대답을 얻은 데로 행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겪게 될 때,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를 알려고 하면 할수록, 거절하고 부인하면 할수록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 훌륭한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 분들의 공통점은 그런 일을 겪게 될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지를 물으려고 하기 보다는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실까? 나는 이 일을 겪으면서 어떻게 믿음으로 응답할까? 를 묻고 그 대답을 삶으로 실천했습니다. 욥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며서 그랬고, 다윗이 사울왕의 집요한 공격을 받으면서 그렇게 했고,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가서 그렇게 했고, 베드로, 사도들, 바울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일을 받아들이고 순종했습니다.
마리아는 받아들이기 힘들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천사가 나타나 말하니까 그냥 정신없이 황홀경에 빠져서 얼떨결에 대답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마리아는 처녀인 자기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마리아가 받아들임으로 구원의 성육신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그 곁에서 남편 요셉이 마리아의 처녀 잉태를 같은 신앙으로 받아들였기에 성탄이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는 갑자기 들이닥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받아들였습니다. 38절에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가리켜 주의 여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종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주인의 뜻에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명령에 그저 순종할 뿐인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종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삶의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하여 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는 아닙니다. 이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종이라는 사실, 하나님 앞에서 종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나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란, 인간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고, 연약한 모습이 있고, 미련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고, 실수를 하며 스스로를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8,9절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길과 내 길이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순종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지만 받아들였습니다. “주의 여종이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무엇인가를 이루어가고 있음을 믿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루실 것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을 더욱 알아간다는 것은 곧 내 삶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관여하고 계시고, 모든 일, 즉 즐거운 일, 슬픈 일, 기쁜 일, 괴로운 일, 평범한 일, 이해할 수 없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고, 믿는 것이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33절 이하의 말씀에, “하나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생각을 잘 안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님의 의논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우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우리가 쉽게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다 알려고 하거나 좁은 머리로 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믿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은 그냥 이해하면 됩니다. 이해가 되는 일이라면 이해하면 되니까 다른 게 뭐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나게 되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 신뢰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우리가 감히 측량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의 지혜를 뛰어넘는 일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또는 앞으로 만날 이해하기 힘든 일, 받아들이기 힘든 일을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 속에서 소망을 붙잡는 사람을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고,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불평, 원망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을 부정정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주어진 상황과 사건이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일을 통해서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믿음 중의 믿음의 꽃입니다. 그 꽃은 순종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교우 여러분, 마리아처럼, 남편 요셉처럼 모든 일속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음을 믿고, 그것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받아들이기 힘들 때에도 믿고 받아들이고 순종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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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1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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